목회·선교
선교현장의 목소리 ㊷ 미국 최수일 선교사
다민족 선교 40년 외길
피터 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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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01 [23:5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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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일 선교사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1989년 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선교부의 파송으로 인도네시아에서 10년간 사역. 2000년부터 남가주 플러튼에서 다민족 선교(Church of Freedom in Christ), 2010년부터 10년간 한국 창원에서 외국인 선교, NGO 미션단체 창원다문화펠로쉽 대표와 경남미래교육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2020년 5월 미국으로 귀국 현재 “교회와 나라를 위한 3.3.3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크리스찬투데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때로 그들의 삶은 세속적인 안목으로 보면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인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의 소명이 무엇인지 확신하며 살았다.

 

오늘 소개하는 최수일 선교사는 주어진 사명의 완수를 위해 기꺼이 그 길을 따라가는 삶을 선택했다. 특별히 다민족을 위한 복음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과도 같은 그의 사명이다. 10년 단위로 선교의 맥을 잇고 있는 최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파송 선교사를 시작으로 남가주에서의 다민족 선교, 한국에서의 다민족 선교와 기독교 시민운동, 다시 미국에서의 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운동으로 이어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첫 출발

 

1989년 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은 최 선교사는 뉴질랜드에서 1년간 타문화권 선교 공부(New Zealand Bible College)를 마치고,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에 있는 ‘인니 복음주의 신학교’(STII)에서 교수사역을 시작했다. 학생 수나 규모로 인도네시아 최대의 신학교였던 이 학교에서 최 선교사는 학생들이 졸업 때까지 개인 전도로 세례교인 15명 이상을 가진 기도소를 가져야만 졸업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약 1년 후에 인도네시아 교회를 시작하였지요. 협력하는 교단의 전도사와 몇 명의 교인과 더불어 시작했습니다. 설립예배를 인도네시아 교단의 주도로 드리고 저희가 사는 집에서 예배를 모였습니다. 집에서 교회를 하니까 이슬람들이 어떤 때는 돌을 던지고, 또 뱀을 대문에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사역하는 동안 그곳에 한인들이 60명 정도 있었습니다. 유학생들이 주류였지요. 주일에 인도네시아 교회예배 후에 한인예배로 모였습니다. 그 교회가 금년에 30년째 한인교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 최수일 선교사가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     © 크리스찬투데이

 

남가주에서의 다민족 선교

 

안식년을 포함해 자카르타에서 2기 사역까지 10년간의 선교사역을 마친 최 선교사는 미국 LA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세계 여러 민족들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시대의 사회적 변화로 대규모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인 미국에, 복음 증거가 힘든 지역의 강성 이슬람, 힌두교, 불교권 출신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최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시어 복음을 받게 하시는 기회로 깨달았다. 

 

이러한 선교의 새로운 패턴을 갖고 2000년도에 미국으로 선교지를 옮긴 최수일 선교사 부부는 한인교회의 부교역자 사역을 통해 다민족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복음장로교회의 부목사로 섬기면서 주말에 인근 양로병원을 방문해 그 곳에 있는 여러 나라 형제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예배를 인도했다.

 

2006년에는 최수남 선교사가 당시 교사로 근무했던 미국 초등학교 다목적 홀을 렌트해 Church of Freedom in Christ을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아내가 미주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사목회를 했습니다. 일본, 중국, 히스패닉 및 한인... 그야말로 다민족 선교 교회였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분들이 담임목회로 나아간 분들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10년간 미국에서 사역을 하던 중, 한국에 외국인 수효가 급증하며 새로운 선교 상황에 놓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한국으로 나가고 아내는 계속해 1년을 더 시무하다가 다른 목회자가 인계하고 선교사 신분으로 저와 외국인 선교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외국인 형제들과 찬양예배에 초청받아, 이주민의 노래, 약한 나를 강하게(Let the weak say I am strong)를 불렀다.     © 크리스찬투데이

 

한국에서 다민족 선교와 기독교 시민운동을 시작하다.

 

최 선교사는 2010년 7월 한국에서 외국인 선교를 시작한다. 당시 한국에는 근로자, 다문화 가정, 상사 직원 및 유학생 숫자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그 당시 외국인 130만 명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350만 명으로 봅니다. 그러나 선교는 아직도 외국에 나가는 것만을 선교로 취급하고 국내의 외국인 선교에는 눈이 열지지 않았지요. 그러니 후원을 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해 8월에 신학대학원 동기회가 있어 참석하고 저의 비전을 말씀드렸습니다. 동기들을 중심으로 선교비를 후원해줌으로 10년간 한국에서 선교를 잘 할 수 있었고 교회 시설들을 갖출 수가 있었습니다.” 

 

▲ 최수일 선교사는 이주근로자들을 위해 한글문화학교를 개설했다.     © 크리스찬투데이

 

최 선교사가 한국에서 10년간 외국인을 선교하는 동안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청년들이 주류였다.

 

“캄보디아로 돌아간 ‘점윳’은 그곳에서 장인 목사를 도와 목회를 잘 하고 지금도 저희가 돕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나올 때는 별로 신앙이 없었는데 네팔로 돌아간 후에는 신실한 교인이 ‘토라’도 있고, 미국에서 영어교사로 나온 ‘네이트’는 가정이 깨어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계속 신앙으로 살며 내년 6월이면 10년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데 사장님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 임금체불을 당하여 노동청에 고발하여 받아준 일들, 한국직장문화에 적응이 안 되어 문제가 생긴 경우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최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2010년부터 매년 거르지 않고 ‘다문화 성탄 송년의 밤’을 10년 동안 개최했다. 경남 함안군의 년 말 문화행사가 될 정도였다. 지자체 장들이 축사를 하고 외국인 150명 정도가 모여 성탄축제를 하는 복음의 장이 된 것이다. 교회 근처의 6개 학교 앞에서 전도 부스를 세워놓고 복음을 외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역 중 하나다. 

 

▲ 최수일 선교사가 이주민근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 크리스찬투데이

 

“2015년부터는 한국에 이슬람 할랄 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속히 확산했습니다. 한국에 이슬람 세력이 확산되는 위기였습니다. 전북 익산에 할랄 단지가 들어서는데 이슬람 남자 도축사 3,000명이 상주하는 이슬람 타운이지요. 이 사업을 막아야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익산의 기독교연합회와 연결하여 버스 1대를 대절하여 갔습니다. 2015년 12월 17일 성탄절을 앞두고 한 “할랄단지 조성 결사반대” 집회에 전주, 나주, 인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날을 시작으로 이 운동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2016년 3월에 이 계획이 백지화 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이슬람 재정을 보조 받고 강원도의 유명한 리조트들을 그들에게 넘기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2016년 3월 3일에 저희 부부가 원주까지 가서 도청 앞 시위를 했습니다. 그곳의 동지들이 직장 생활하면서 출근 전에 1인 시위하고 점심시간에 또 하고 순서를 짜서 약 4개월을 투쟁하는 중에 도지사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은 이슬람 돈을 받지 않아도 잘 진행되었지요.”

 

▲ 최수일 선교사가 KBS와의 인터뷰에서 제주도에 이슬람 위장 난민이 많이 몰려와 잘 선별하어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 크리스찬투데이

 

“2016년 4월에 창원의 큰 병원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이슬람 신자들을 ‘의료 관광 유치’하는 사업을 정부와 말레이지아의 할랄국과의 협약(MOU)속에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남의 기독교지도자들과 ‘이슬람 대책 경남도민운동’을 창설하고 월 1회 기도회를 가지면서 대처했습니다. 병원장과의 2회의 면담 끝에 격렬한 논쟁을 하고 많은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적으로 백지화했습니다. 이외에도 대구, 제주도, 인천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함께하신 일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좌파정부가 들어서면서 보편적 가치관에 상반하는 각종 조례와 법률들이 제정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교회를 대적하는 문화적 적그리스도라 보고 적극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해방’과 ‘학습태만’ 을 조장하는 경남 학생 인권조례안 반대, 각지자체의 성평등 조례안. 반대 운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면담을 하며, 언론에 공개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습니다. 이 모든 방법들이 크리스천들이 해야 할 정당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최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선교 이상의 기독교를 지키고자하는 일사각오의 그야말로 혼신을 불태운 10년 이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사역을 후임 선교사에게 물려주고, 최 선교사는 202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 최수일 선교사는 한국에 있는 동안 정기적으로 외국인초청 송년의밤과 야유회 등을 매년 실행했다. 

 

미국에서 교회와 나라 위한 기도회와 기독교 시민운동을 시작하다.

 

“저희가 은퇴 후 거주할 곳도 미국인데 감사하게도 주님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힘을 잃어버렸고 나라는 급진좌파들의 득세로 보편적 가치를 표방하는 정치 실현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남아 있는 교회도 어렵게 될 수박에 없습니다. 이런 때에 미국 사역의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이 불안정하지만 금년 5월에 귀국했습니다.”

 

최 선교사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기도운동이다. 3 사람이, 하루 3번, 교회와 나라와 내 가족 3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3.3.3 기도운동’ 이다.

 

▲ 현재 최수일 선교사는 LA를 중심으로 ‘3.3.3 기도운동’을 펼치고 있다(맨 왼쪽이 최 선교사의 사모 최수남 선교사).     © 크리스찬투데이

 

“모세와 아론과 훌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기도한 것이 모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위기를 만난 자기 처소에서 매일 3번 기도한 것을 착안하여 하루 3번 기도하며, 주요 기도제목은 3가지 교회와 나라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3.3.3 기도운동이라 작명을 하고 장소와 모일 동지들을 위해 준비하는데 시작을 며칠 앞두고 ‘실내 모임 금지 조치’가 발표되어 어렵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성도들의 연합하여 기도하는 소리를 그렇게 듣기 원하신다’는 감동이 와서 시작했습니다. 공원에서 3명이 모였습니다. 감사하지요. 그 시작 후에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당분간 매주 화요일 10시 30분에서 12시까지 공원에서 모이게 됩니다.” 

 

최수일 선교사는 인터뷰 말미에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꼭 필요한 일에 사용하신다”며 “귀하게 쓰임 받는 즐거운 삶이되라”는 말이 의심심장하게 들린다. 그의 앞으로 미국에서의 10년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더욱 기대가 된다.

 

3.3.3 기도운동 문의: (213)700-1802 최수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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