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문화로 성경읽기(39) - 이삭, “속았을까? 속은척 했을까?”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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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3/04 [08:2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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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삭은, 나귀에 실린 땔감의 무게를 보고 희생제물의 크기에 대한 예감은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던 누구였다면, 나는 어떻게 느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것은 한 이야기를 건조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며 읽기 위한 질문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당사자의 신을 신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때 그 자리로 시간 여행 공간 여행을 떠나야만 합니다. 지레짐작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은 내 선입견이 작용하여 오히려 왜곡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창세기에서 이삭에 관련한 두 개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봅니다. 너무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이삭이 아브라함에 의해 번제로 드려질 뻔했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 에서로 위장하고, 에서가 받을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속지 않았다?

 

▲ 나귀는 230리터 정도를 실고 다닌다. 성경의 단위로 나귀에 한 가득 실은 것을 호멜로 부른다. 

 

이 첫 번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제물을 바칠 때 사용되는 땔감과 물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물을 태울 경우, 태워지는 동물의 몸무게의 2~6 배 정도의 땔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래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준비한 땔감의 무게는 곧 번제물의 존재감을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 4)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나귀에 싣고 길을 떠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리는 것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었을까요? 모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경우, 자신이 키우던 것에서 흠 없는 것을 골라서 바치곤 하던 이야기를 이삭이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보다 한참 시간이 흘러간 다음에 주어진 레위기 율법에는 이 같은 원리가 녹아 있습니다) 또한 번제로 쓸 ‘어린 양’은 대개 몇 개월 된 것을 바쳤는지, 몸무게는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6개월에서 1년 안팎 된 양의 무게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이삭의 무게를 넘어서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삭은 혹시라도 자신이 제물이 될 것을 알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더욱 충격적인 장면이 그려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창 22:6) 라는 표현입니다. 이삭이 자신을 태울, 가볍지 않았을 땔감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삭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까요? 이 장면을 연출한 아브라함은 물론, 이 이야기를 듣던 이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공감하지 않았을까요?

 

이삭은, 야곱에게 속지 않았다?

 

▲ 목자로 평생을 살아온 이삭, 그의 눈이 어두었다 해도 염소털을 구별못한다는 것은 이상스럽다. 

 

노년의 이삭은 큰아들 에서인 척 행세를 하는 야곱과 그의 아내 리브가의 속임수에 속은 것일까요? 아니면 속은 척한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이 엉뚱하게 다가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몇 가지의 추가적인 궁금함을 안고서 이야기를 다시 읽어봅니다. 결론은 이삭이 '속은 척'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정도의 실마리를 갖고 다가서 봅니다. 하나는 염소 털과 사람 몸의 털의 촉각이 구별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 이삭이 일평생 목자로 살아왔다는 점, 그리고 시각이 무디어진다고 촉각이 같이 무디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입니다.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창 27:15, 16)

 

성경은 야곱이 털이 많은 에서로 위장하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손과 목에 두른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염소 새끼 가죽의 털이 주는 느낌이 털 많은 남자가 안겨주는 촉감은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아예 다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강아지 철과 고양이 털의 촉감이 주는 차이 그 이상이 염소 새끼 털과 털북숭이 에서의 털이 주는 촉감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야 그렇다고 해도,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촉각이 어두워져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하며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이 어두워진 상태로 묘사되는 이삭, 그렇다면 그의 촉각은 더욱 민감했을 것입니다. 시력이 약해졌던 것이지, 다른 감각도 같이 무디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감각이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염소 가죽에서 느끼는 촉감과 털 많은 남자의 털이 주는 촉감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염소 새끼 털은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참, 이삭이 목자로서 100년 이상을 살아왔다는 것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눈감고도 양과 염소를 구별할 정도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삭의 눈을 속이려던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은 오히려 그들의 눈이 어두웠음을 드러냅니다.

 

▲ 염소털은 까칠까칠하다. 양과 염소의 털은 확연히 그 느낌이 다르고, 물론 사람의 털과 촉감과 다르다.

 

다시 생각하기

 

이 두 개의 별도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는 면이 있습니다. 번제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이삭은, 아무런 충격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이삭의 감정을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왜 이삭은 속은 척한 것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는 말을 이삭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리브가를 통해 전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반항이나 저항 같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성경은 때때로 이렇게 한 사람의 섬세한 감정을 느낄 만한 내용을 채워놓고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표현한다면, 연기력에 뛰어난 배우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필요한 그런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존중하시고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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