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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37)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겨자씨밖에 심을 것 없던 삶에 주목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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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1/07 [02:46]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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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철이면 갈릴리 호수 주변과 길르앗 산지, 바산, 골란 고원 등에는 노란색 겨자꽃으로 출렁거린다.     © 김동문 선교사

 

미주 한인사회는 조금 덜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1~3월 중에 이스라엘 등으로 이른바 성지순례를 떠나는 개인과 교회가 많습니다. 여행 단체가 많아서 안내자를 구하기가 힘들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이스라엘 현지에서 그리고 여행업 관계자로부터 듣습니다.

 

바라기는 기념교회 순례만이 아니라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이 곁에 있는데도 기념교회만 찾는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 등을 하기 위해 선택하고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으면서 그 머릿속으로 전혀 엉뚱한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본문이 겨자씨만한 믿음 관련 구절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작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떠올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오래전 한국의 한 신학교에서 겨자씨 비유 본문이 담긴 책갈피를 만들었고, 이스라엘 현지에서 검은색 씨가 담겨있는 것을 겨자씨라며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 씨는 아주아주 작은 씨였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는 검은색 담배(Nicotiana glauca)씨였습니다. 이 나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식물이고, 미국에서도 눈에 잘 띄는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역에 이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 2백 년도 안되는 것입니다. 작은 씨,

가장 작은 씨를 예수님이 비유에서 언급하신 겨자씨로 생각하면서 비롯된 엉뚱한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성경 속에서

 

▲ 겨자 꽃은 유채꽃과 같은 종류이다. 예수시대 겨자꽃은야생에 넘쳐나는 들풀같은존재이기도 하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 32)

 

이 본문을 읽고 나서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큰 나무, 높은 나무가지 위에 있는 둥지, 그 둥지에 새가 머물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쓰여있다, ‘공중의 새들이 둥지를 틀 정도로 커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에 자신의 생각이 뒤엉켜진 허상입니다.

 

이것은 몇 가지 편견과 오해가 깔린 것입니다. 겨자씨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일까요? 최소한 예수 시대 이스라엘에서 그랬던 것일까요? 겨자씨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도 아

니며, 고댜 이스라엘 땅에서도 가장 작은 씨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씨라고 말씀하신 것을 안 믿는 것인가요?”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겨자풀은 한국의 유채꽃에 해당합니다. 유채꽃과 겨자꽃은 같은 종에 해당합니다. 유채가 나무가 아니고 풀인 것처럼, 겨자풀도 나무가 아닙니다. “겨자가 풀이라고요? 아니 성경에 겨자를 나무로 표현했는데 무슨 말입니까?”다시 반문할 이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겨자(풀)’를 ‘나무’로 부르는 것도 식물학 기준이 아닙니다. 전형적인 모습의 풀의 모습이 아니라 큼지막한 것은 나무로 부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 겨자풀 가지 위에 참새가 깃들고 있다. 새들은 풀 위에도 깃들곤 한다. 둥지틀고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겨자씨만한’ 이라는 표현은 ‘아주 작은’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밤톨만한. 밴댕이 속알딱지 같은, 눈꼽만한, 콩알만한, 쥐방울만한, 깨알같은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것은 과학의 언어도 아니고 실물로서의 제일 작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는 과학적이나 식물학적인 비교에 따른 크기가 가장 작은 씨는 아니었습니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종류의 곡식이나 씨앗도 많았습니다. 유대의 들판에 자라고 있던 난초의 씨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 갈릴리 등의 봄철 들판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인근 산지에서도 봄철이면 볼 수 있었던 겨자씨는 대표적인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저 작은 풀섶에도 새들은 날개를 접고 쉬곤 합니다. 그것이 새들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임에도 우리가 편견을 갖고 본문을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크기가 작은 콩 종류들은 씨앗(또는 향신료?)으로, 크기가 큰 것들은 채소(나물?)로 분류했습니다. 미쉬나 등에서는 모든 씨앗 종류들은 밭(채전)에 심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같은 밭에 다른 씨앗을 섞어서 뿌리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는 표현입니다. 겨자풀은 그야말로 야생입니다. 봄철이면 갈릴리 지방은 물론 데가볼리, 바산, 골란 지방 할 것 없이 온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풀, 겨자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 속 사람은 왜 이 겨자씨를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것일까요?

 

그것도 채소(나물)만 심도록 되어 있는 규정도 어기면서, 수확작물도 아니고 돈 될 만한 것도 전혀 아닌데 말입니다. 게다가 심을 것이 겨자씨 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말입니다.

 

다시 생각하기

 

▲ 겨자 꽃이 지고난 뒤에 들판은 온통 겨자씨를 가득 머금고있는 씨주머니를 가진 마른 겨자풀로 가득하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겨자씨 비유가 그려주는 풍경은 무엇일까요? 씨앗의 작은 크기에 비할 수 없는, 돈 되는 채소(나물) 비해 그 크기가 엄청커지는 모습, 게다가 빨리 자라는 속도감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천국은 어떤 면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삶의 자리에서도 자라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소박하기 그지없고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나고 있다고 응원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겨자씨 비유를 통해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겨자씨밖에 심을 것 없던 어떤 이의 삶에서도 빠르게 자라가는 하나님나라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 필자 김동문 선교사는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사역했으며 <오감으로 성경읽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주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선교전략과 성경의 땅에 대해 폭넓게 조명하는 세미나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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