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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36) - 오히려 다시스 대신 니느웨로 가야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는 삶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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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27 [03:1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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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스라엘의 부유층이 사용하던 작은 크기의 화덕과 맷돌, 대야 등은 물과 불이 귀했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와싱톤 성경박물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의 일상을 이해하는 것은 소중합니다. 역사에 흔적도 남기지 못한 절대다수의 백성이 살던 일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역사, 그 시대의 경제와 문화,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서, 설교를 하고 들으면서 실물 학습에 무관심할까요?

 

아래 사진에는 집안에서 빵을 만들 때 사용하던 도구(탄누르)와 발을 씻던 흙대야 등이 담겨있습니다. 크기는 작아도 가정용 흙 화덕(오늘날로 친다면 오븐?)은 물론, 곡식을 빻던 맷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을 살던 그저 평범한 백성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에게 빵은, 물은, 정결함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신학교에서도 성경 박물관은 고사하고, 체험학습 자료실조차 없습니다. 그저 글만 깨우치게 하려는 듯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이야기, 그 메시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물 교육에 둔감하거나 무관심하고, 체험학습으로서의 교회 교육에도 무반응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반영하고 있는 그 시대 속에 메아리쳐졌다고 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성경 속에서

 

▲ 지중해변의 욥바 지역이 노을로 물들고 있다. 인종 혐오와민족 배제로 고통하던 요나와 베드로의 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욥바) 

 

좁은 문, 좁은 길 그리고 넓은 문, 넓은 길(마태복음 7:13, 14),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좁은 길, 넓은 길은 실제 길의 폭(만)을 묘사하는 것일까? 좁은 문, 넓은 문은 실제문(만)의 크기와 폭을 서술하는 것일까요? 예수 시대,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 시절 길은 어떤 형편이었을까요? 그 길에 닿아있는 문은 어떠하였을까요? 도시화의 비율이 우리들의 생각과는 너무 다르게 아주 소수였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10~15퍼센트 정도로 도시 거주자를 추정합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삶을 살던 백성들이 90 퍼센트 안팎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또한 글을 깨우친 이의 비율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3 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예수 시대 로마 도시와 도시 아닌 곳을 떠올리면 기본적인 풍경이 있습니다. 좁은 길에 이어지는 좁은 문, 그 문을 지나면 무엇이 이어졌을까요? 넓은 길에 이어지는 넓은 문, 그 문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었을까요? 로마식 도시에는 대로(카르도)가 있었습니다. 큰 성문을 들어가면 바로 큰 길이 이어졌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이 뜻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좁은 문, 좁은 길이 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 로마로 사는 삶, 로마를 따르는 삶과 그렇지 않은 길, 그 삶은, 무엇일까요?

 

땅끝까지 복음 전하자(사도행전 1:8,9)!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표현이고 진지한 고백의 근거입니다.

 

▲ 마침내 요나가 와야 했던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성,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라크 니느웨) 

 

그런데 그 ’땅 끝‘은 어디일까요? 그 땅 끝을 언급하던 이들이나 그 말을 듣던 이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그 옛날 사람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습니다. 평평한 지구의 해가 지는 땅끝에 가면 바다 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바다 끝을 넘어가면 낭떠러지가 있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곳 을‘땅끝’ 이라 말했고‘, 바다끝’으로 불렀습니다. 그 ‘땅끝’은 바울이 말한 ‘서바나’ Spain 이였고, 저 ‘바다 끝’은 요나의 ‘다시스’ Tarshish 였습니다, 지중해 문명의 끝자락입니다. 그곳은 낭만적이거나 그저 그렇게 세상의 끝을 말하는 어떤 장소나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 땅끝에 서는 것은 죽음의 벼랑 끝이었고, 죽음의 자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 이곳까지 가고자 했던 요나, 바울, 베드로는 엄청난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나요? 이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 왜 비판받는 것일까요? 부름의 자리를 피하는 목적으로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 베드로, 아나니야가 죽음의 자리를 감수하면서까지 피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는 것일까요?

 

죽음의 자리 그곳에 서서 죽는 죽음으로 거부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자리, 눈 뜨고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땅끝으로 가는 것보다 더 피하고 싶은 자리? 그곳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Nineveh가 그곳이었고, 베드로에게 로마 총독부가 자리한 가이사랴 Caesarea가 거기였습니다.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직가 거리 Straight Street가 그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에게 마지막 유월절 예루살렘이었고, 사도 바울과 베드로에게 로마 Rome 였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 로마식 도시에는 큰 문 안에 이어지는 대로(카르도)가 있었다. 예루살렘에도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로가 있었다. (요르단 제라쉬)  

 

나에게, 우리에게 ‘땅끝’은 어디인가요? 두루뭉술한 추상화된 개념으로서의 ‘땅끝’이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과 삶, 인격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 땅끝에 서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은 헌신이나 결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도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시스, 서바나, 땅끝으로 가는 선택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내 안에서 거부하고 있는 그곳으로 가는 새로운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로, 서바나가 아니라 마게도냐로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메섹 직가로, 가이사랴로, 디베랴를 넘어 로마로 가야 합니다. 그곳이 다시스, 서바나, 땅끝보다 더 땅끝 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한 나름의 근거를 댈 수 있는 배제와 혐오의 대상인 지역과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직면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이사랴로, 직가로 가야 합니다. 가이사랴, 직가, 니느웨성은 어디일까요? 사울, 고넬료, 니느웨성 주민은 누구일까요? 니느웨 백성을 만나고, 사울을 마주하고, 고넬료와 같이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나라이고,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가는 것으로 내 안에 자리한 사울과 고넬료, 니느웨 백성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필자 김동문 선교사는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사역했으며 <오감으로 성경읽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주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선교전략과 성경의 땅에 대해 폭넓게 조명하는 세미나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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