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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32) -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편지처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은 '편지'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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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31 [08:23]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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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백성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편지

 

오늘의 이야기는 거울과 편지에 관한 것입니다. 거울은 오래된 서양 동화에도,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백성공주 이야기 같은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도 거울은 존재합니다. 물론 성경 속에도 거울이 나타납니다.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메시지 같은 매체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더 일상인 지금이야 편지의 느낌이 이전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가 안겨주는 정감이나 기다림 같은 추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이런 착각을 합니다. 어떤 유물이 나오면 그 유물이 그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거나, 누구나 사용했을 것이라는 오해가 그것입니다. 등잔을 사용하던 시절, 구리거울이 사용되던 그 시절도 누구나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아주 일부의 사람만이 이것을 갖고 있었고, 사용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거울도, 편지도 마찬가지로 아주 귀한 존재였습니다. 누구나 그 것을 갖지도 사용하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이나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일까요? 오늘도 2천 년 전 로마제국으로 떠납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성경을 다시 읽어봅니다.

 

▲ 청동거울. 유리가 없던 시절, 잘 닦인 청동거울은 자기의 맨 얼굴의 윤곽을 아는 것에는 유익했다.     ©김동문 선교사

 

성경 속으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그 옛날 고대 근동에서 거울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출애굽 당시 고대 이집트 제국에서도 예수 시대 로마 제국에서도 청동거울은 부유층의 것이었습니다. 일반 서민은 소유는 둘째치고 구경도 할 수 없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리거울을 갖고 있던 출애굽 광야에서 ‘거울’을 사용하던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출애굽기 38:8)은 부자였을 것입니다. 구약, 신약 성경에서 '거울'을 언급하는 여러 본문이 있습니다.

 

거울로 얼굴을 보다  

 

2천 년 전 로마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울은 아무리 광택을 낸다고 하여도 선명하게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리거울을 사용하던 때라 분위기가 달랐겠지만, 얼굴을 가리던 여인들도 화장을 할 때 거울 앞에 서서 수건(너울 또는 얼굴 가리개 등)을 벗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바울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여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거울을 보기 위해서는 얼굴을 가렸던 것을 걷어내고 맨 얼굴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위 본문에서 ‘수건’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그런 수건이 아닙니다. 남성용 머리 덮개나 여성용 베일이나 너울 등 얼굴 가리개(머리 덮개)를 뜻합니다. 바울의 이 표현의 강조점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이 거울을 보는 행위 또는 장면일까요? 아니면, 거울을 보기 위하여 취하는 수건을 벗는 장면일까요? 거울 앞에 선 이는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나 남성용 얼굴 가리개(머리 덮개)를 벗는 장면이 강조되는 듯합니다. 즉 거울을 보기 위해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더 강조되는 듯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  

 

▲ 양피지에 새겨진 율법 두루마리. 글을 쓰고 읽는 것,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었을 뿐이다.     © 김동문 선교사

 

고대 로마에서 편지의 존재감은 오늘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쓸 수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자를 읽고 쓰는 얼마 안 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호사였습니다. 또한 글을 읽고 쓴다고 하여도 필기구(펜이나 잉크, 양피지나 다양한 서판 등)의 값이 무척 비쌌습니다.

 

물가 변동이 계속되었기에, 양피지의 고정된 가치를 알 수는 없습니다. 양피지 종이 한 장에 하루 품삯, 일주일 품삯을 내야할 정도였으니 누가 쉽게 편지를 쓰고 주고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파피루스는 양피지와 달리 가볍고 쓰기 간편했습니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값비싼 수입품이었습니다. 원산지 이집트에서도 노동자의 노동의 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하루치 품삯부터 일주일치 품삯을 지불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에서 파피루스 값은 결코 싼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고린도 지역의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묘사하는 장면은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양피지에 펜과 잉크를 쓰는 장면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먹으로 쓰지 않는 편지였습니다. 돌 판에 새겨서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편지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고대 로마 바울 당시의 양피지와 철로 만든 펜과 잉크의 존재는 10년 전 가난한 나라의 서민에게 아이패드 같은 존재였을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다시 생각하기

 

▲ 로마 제국에서 돌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 이야기의 주인공 대부분은 죽은 이를 영웅화시키거나 신들일 뿐이었다.     © 김동문 선교사

 

거울이나 양피지 위에 쓰여진 편지는 하나의 그림 언어입니다. 그 시대의 귀족의 생활용품을 반영하는 매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 같이 아주 분명하게 주의 나라, 주의 얼굴을 보게될 것, 알게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서신 등에 등장하는 거울은 맨 얼굴을 직접 보는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희미함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존귀한 자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눈길을 모으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신전이나 무덤 등에 아로 새겨 넣은 글씨도 아니고, 일상에서 제한된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만 주고받는 먹으로 쓴 편지도 아닌, 새로운 편지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고 있는 ‘편지’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백성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편지인 것입니다.

 

■ 필자 김동문 선교사는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사역했으며 <오감으로 성경읽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주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선교전략과 성경의 땅에 대해 폭넓게 조명하는 세미나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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