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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포로가 된 오늘날의 교회
김기홍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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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31 [23:4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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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고가의 제품 신발을 신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부르는 논란의 인스타그램( Instagram) 계정이 있었다. @PreachersNSneakers라는 계정에는 자신들의 소셜 미디어 계정이나 공개된 곳에서 가져온 연예인 설교자들의 사진을 게시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의복에 가격표를 붙인다. 한 목사는 6,000달러의 이지(Yeezys)와 2,500달러의 하입비스트(Hypebeast) 그레일 신발(grail sneakers)을 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듀크 대학의 기독교 역사학 교수인 케이트 볼러 (Kate Bowler)는 뉴욕 타임즈 (New York Times)에서 미국의 번영 복음에 관해 비슷한 내용을 썼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이러니해서 처음에 크게 웃게 만들지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씁쓸하게 만든다.  그녀는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한 번은 대형교회 목사가 자신의 연기를 내는 기계에 질식해서 거의 죽을 뻔한 것을 본적이 있다"고 썼다. 케이트는 자신이 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도 본 것을 믿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빌(Bill)이 “어떻게 파산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마이크(Mike)는 "두 가지 방식으로요. 점차적으로, 그리고 갑자기"라고 대답한다. 어떻게 목회자가 평균 미국인이 은퇴에 부여하는 연간 금액을 초과하는 고가의 신발을 신게 되었을까? “두 가지 방식으로. 점차적으로, 그리고 갑자기” 이것은 미국 소비주의와 미국 교회 간의 불결한 결혼의 완성이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변증학자 오스 기니스(Os Geinness)는 오늘날 복음주의를 바라 볼 때, 그것은 말씀과 성령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지배적인 시대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미국 교회는 숫자적으로는 강하지만 세속적이기 때문에 결코 강하지 않다. 미국의 교회들은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의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심각한 문화적 포로 상태에 있다.

 

몇 년 전에 서양의 대형 교회와 선교적 교회들이 왜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지, 그리고 그러한 얕은 믿음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지를 묻는 중국 지하 교회 지도자들의 로잔 보고서를 읽었을 때 이러한 문화적 포로 생활을 볼 수 있었다.

 

목표는 항상 제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로마의 콘스탄티노와 교회 성장 운동 이전, 즉 교회의 존재론적 정체성이 우리들이 보내진 장소에서 우리가 앉아 있는 장소로 미묘하게 옮겨 가기 전에 위임하신 것이다. 

 

교회는 여러 면에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좋은 쇼를 펼치고 흥미를 끌어내는 데 뛰어나지만 삶의 변화와 변혁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족하다. 우리는 더 시원하고 더 멋져 보이지만, 깊이가 더 깊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이지(Yeezys)신발을 신고, 연기내는 기계와 TV 쇼를 가진 목회자가 있지만 그에 비해 능력은 훨씬 부족하다.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이 온 세상에 끼쳤던 영향력을 상기해야한다. 아마도 오늘날의 지도자들의 옷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은 어쩌면 높은 곳으로 부터 온 능력의 옷을 입지 못한 것에 대한 잠재의식적인 보상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우리는 선교 목표를 재조정해야 한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심각한 문화적 포로생활을 하는 교회에 대한 예언적 신호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제자도의 궁극적인 시험은 희생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희생은 우리 자신의 주권의 정도를 다루는 반면 순종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다루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부자 청년이 주말에 틴더를 사용하는 일종의 이교도 투자 은행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전념했고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도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해 왔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붙잡고 있는 물질에 대한 도전을 주셨을 때 그의 제자도 훈련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을 때 아마도 심히 놀랐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것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재산을 더 가치있게 여겼던 것이다. G-O-D와 G-O-O-D의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의 철자이지만 우상 숭배와 예배를 구분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주권을 구별한다.

 

1970 년대 후반에 치명적인 예언자적 목소리를 낸 키스 그린(Keith Green)은 “순종하는 것이 희생보다 낫다”는 노래에서 순종에 대한 부름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순종하는 것이 희생보다 낫다.

나는 너의 돈이 필요 없어.

나는 네 인생을 원해.

순종하는 것이 희생보다 낫다.

나는 일요일과 수요일 밤 이상을 원한다.

매일 나에게 올 수 없다면

그러면 오려고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세상을 그리스도께 승리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변혁의 길을 열어야한다.

 

둘째, 우리는 개인의 주권을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선교는 문화적 연계가 아니다. 잠시 동안 유효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단지 또 다른 옵션이 되신 것이라면, 우리는 이 심각한 문화적 포로 생활에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 정치인 아브라함 쿠이퍼(Abraham Kuiper)는 “우리 주권자인 그리스도께서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내 것’이라고 부르짖지 않는 곳은 1제곱 인치도 없다”고 했다.

 

우리의 모든 변덕에 순응하는 하나님만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 분은 갈보리에서 죽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대신에 그 분은 깊은 포로 상태에 있는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화에 불과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은 확실한 죽음이다. 죽음은 시대의 정신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다. 낡은 거친 십자가와 높은 곳에서의 능력은 분리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대명령이다. 개인의 주권이 그리스도의 주권에 완전히 항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를 누락시키는 죄가 대명령을 추월한다. 예수님은 군중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현재의 교회의 위기는 군중은 많지만 제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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