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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30) -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없다
우리가 맺는 말씀 열매에 따라 마음 밭 구별된다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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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30 [03:4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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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가는 농부, 그가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풍성한 수확일 것이다.     © 김동문 선교사

 

성경을 읽지만 그 본문을 읽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고정 관념이나 선입견, 선지식이 있는 그대로 성경을 읽는 것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처음 대하는 신선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비유는 실화이든 예화이든 하나의 바탕을 까는 이야기를 활용하여 진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이때 사용된 씨 뿌리는 밭의 이야기는 본론을 가리키는 일종의 교육용 소품이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엄연히 갖고 있는 한계를 떠올리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 성경,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주 익숙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2천년이나 된 아주 오랜 옛날에 일어난 일로 생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자리와 지금 이 자리에 사이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시간, 공간, 문화 등 수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놓치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를 읽는 우리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시대 상황을 잘 모른다 하여도, 최소한 이야기의 무대 속으로 들어가는 공간 이동은 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 속 무대는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고대 이스라엘의 들판입니다. 그때의 밭은 어떤 형편이었고, 씨 뿌리는 풍경, 농경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그 이야기를 배경으로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 양떼가 노닐던 공간도 봄이 되면 농부의 손길을 통해 밭으로 변한다.     © 김동문 선교사

 

성경 속으로

 

이 비유는 단순하게 봐야할 것 같습니다. 씨 뿌리는 밭의 풍경은 그저 이야기를 펼쳐가는 하나의 도입인 듯합니다. 그리고 논리적 비약을 통해 새로운 그림 언어를 끌어들입니다. 이제 공간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 들로, 밭으로 떠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고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의 형편이 어떤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는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그것을 묵은 땅을 기경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씨를 정성스럽게 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렸습니다. 이 지역의 농사법이 밭에 씨를 뿌리는 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심는 농사법도, 씨앗의 종류에 따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붐 철의 들판 풍경입니다.

 

이 비유에는 씨 뿌리는 자, 씨, 그리고 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씨 뿌리는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풀어주신 비유 해설에도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옥토에 정성껏 잘 뿌려야 한다는 식의 말에 전혀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는 상대방의 가시밭 같은 마음, 돌짝 밭 같은 마음을 갈아주고 그런 다음에 그 옥토 같은 마음 밭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이 본문으로부터 근거를 제공받지 못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그냥 씨를 뿌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합니다. 씨앗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씨’입니다. 그래서 씨앗의 상태나 형편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밀의 씨인지 보리씨 인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씨는 밭을 바꾸지 못합니다. 씨가 떨어진 밭의 조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씨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자체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비유는 그런 해석으로까지 확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땅의 형편에 따른 차별이나 구별도 없이 씨를 흩뿌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밭에 뿌려진 씨에 대한 상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든 이의 4가지 반응을 소개할 뿐입니다. 비유를 설명하는 후속 구절에 씨가 닿는 4가지 지형(?)에 따른 씨의 형편을 비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밭은 주로 석회암 산지 위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남동부의 구릉지 평야나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평야 지대의 평야, 북부의 이스르엘 골짜기에 자리한 평야의 밭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지역에 자리한 밭의 형편이 석회암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밭에는 돌도, 흙도, 가시덤불도 뒤섞여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씨를 심어 거두는 30배, 50배, 100배의 결실은 전혀 기적이 아닙니다. 깨나 겨자씨, 벼나 보리 같은 씨앗을 심으면, 그 수확은 몇 배나 될까요? 종려나무(대추야자), 감람나무(올리브나무), 석류나무를 심으면 그 열매는 몇 배가 될까요? 30배, 50배, 100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씨, 더 많은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씨가 30, 50,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은, 기적이 아닌 상식이고 일상이었습니다. 그 이상을 수확하는 것이 밭농사 현장입니다.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은 돌짝 가시덤불 옥토 길가가 뒤섞여 있다.  ©김동문 선교사

 

다시 생각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 밭을 갈아서 옥토로 바꿔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의 근거도 이 비유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는 옥토에 떨어진 씨 같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잘 받아들이고 반응하여 열매 맺자 는 식의 메시지의 강조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이 가르침을 위한 도입부에 지나치게 눈길을 빼앗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씨 뿌리는 밭의 일상 풍경 속에서 씨는 땅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씨는 열매도 맺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자도 씨의 운명에 대해 책임이 없었습니다. 풍성한 수확에 기대감은 갖을지언정 말입니다.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때문입니다. 옥토 따로, 가시밭 따로, 돌짝밭 따로, 길가 밭 따로가 아니라 한 공간에 다 뒤섞여 있는 밭에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들은 밭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마음 밭이 평가됩니다. 우리가 맺는 말씀의 열매가 우리의 마음 밭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시밭, 돌짝밭, 옥토밭, 길가밭은 우리의 선택에 따른 우리의 책임입니다.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밭은 돌짝 가시덤불 옥토 길가가 뒤섞여 있다.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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