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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22)-가난한 이들에게 무화과는 그림의 떡이었다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무화과, 한국인의 무궁화 같은 민족 존재감 갖고 있어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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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26 [05:13]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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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이 무성해지고 나면 무화과도 훨씬 튼실하게 큼지막하고 더욱 먹음직하게 익어간다. 이것은 여름과실의 대명사였고, 여름실과로 불렀다.     © 김동문 선교사

무궁화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어떤 느낌이 다가오나요? 한인들에게 무궁화는 조국과 민족의 영원, 평화와 번영을 뜻하는 그림 언어입니다. 그 무궁화 같은 존재감을 갖고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무화과입니다. 이 나무는 창세기에서부터 등장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등 여러 중요한 사건에 등장합니다. 오늘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무화과(나무)에 읽힌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이른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1. 성경 속으로

▲ 겨울이 지나며 봄이 차오르면서 무화과나무 가지가 잎이 맺힌다. 그 사이에 지난해 맺힌 무화과가 떨어지지 않은 채 아직 매달려 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 크리스찬투데이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마가복음 11:12, 13)"
 
이 본문을 마주하면서, 먼저 예수 당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브런치에 해당하는 늦은 아침과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곤 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떠오르지 않나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시간 거리인 베다디에서 나올 때 이미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뭔 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직 아침 식사 때도 아니었는데(마태복음 21:18은, ‘이른 아침’으로 표현합니다), 아니 식사 때를 거르지도 않았을텐데, 이미 허기가 진 상황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전날 저녁도 먹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이런 추론에 ‘설마요?’ 하실 분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유월절 즉 4월 초를 전후한 시기는 봄철이고, 겨울이 끝나고 봄을 맞이할 때면 겪던 굶주림의 계절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릿고개로 부르던 가난과 굶주림의 시기를 떠올립니다. 그 허기진 상황에 뭔가 먹을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때아니게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였습니다. 봄철의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할 수가 없습니다. 새 잎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잎이 무성한 것이 허기진 예수님 일행의 눈을 끈 것입니다.
 
제자들이 잎이 무성한 그 무화과나무에서 찾던 것은 무화과열매입니다. 새로 맺힌 열매도 아니면 지난해에 맺힌 떨거지 무화과였는지도 모릅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는데, 왜 무화과열매를 찾았다고 말하나 의아해 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안에는 봄철 무화과와 여름철 무화과가 나옵니다. 여기서 잠시 짧은 정보 하나를 정돈합니다. 성경에 처음 익은 열매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종려나무 등의 ‘처음 익은 열매’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철 무화과는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기에 처음 맞이하는 과일(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익은 열매로 적었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봄철 무화과 즉 조생종 무화과열매였습니다.
 
지금도 요르단이나 이스라엘에서, 물이 풍성한 골짜기 주변이나 산지에는 조생종 무화과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그 지역의 모든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어떤 나무들은 그야말로 잎도 볼 수 없는데, 자그마한 무화과열매가 가득 맺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조생종 무화과나무에 맺혔을 처음 익은 열매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수확이 되어 팔려나갔거나 누군가가 따서 먹었을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안을 다 살펴보는 제자들의 눈길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찾지 못한 그 허탈한 눈빛에 더욱 크게 다가오는 허기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19-34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 자체가 없는 이들이 무엇을 먹을까 선택을 고민을 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선택을 고민한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하루 먹을 빵, 아니 빵 한 조각이라도 오늘 먹었으면, 그것이 감사이고, 기적이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먹을 빵이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었던 이들 말입니다.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상이었던 서민들 말입니다. 이들에게 봄철 궁핍한 계절은 더욱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이방인으로 지칭하던 로마 귀족들의 소비문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잔치의 이름은 심포지움 즉 술취함의 파티’를 말합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symposium'으로, 로마 문화에서는 'convivium'으로 부르던 마시는 파티입니다. 술취함, 성, 지혜가 소비되던 자리였습니다. 배부르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 가득한' 문화였습니다. 로마서 1장도 이런 배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 잎사귀도 없는데 봄철 무화과가 풍성하게 맺힌 무화과나무. 모든 무화과나무가 봄철 무화과를 맺는 것은 아니다.     © 크리스찬투데이

없이 살던 이들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한 것을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뭣이 중한지도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옷값이 사람 몸 값보다 더 비싸게 사는 이들, 차 한 잔 값은 물론 음식 값을 사람 목숨 값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품격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뭣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돈 자랑하는 것 말입니다.
 
이 가을, 선택하는 고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을 기억하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성가시고 번거로운 투정거리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기적이고 간절한 기도 제목인 경우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 주심을 구하라 위세 떨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세금 비율이 높아도 나도 남부럽지 않게 집을 땅을 보유해보고 싶다는 그런 푸념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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