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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16)-우리가 아는 유월절 어린양은 어린 양이 아니다
새끼 아닌 젖과 털 제공하는 젊은 양을 지칭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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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3 [02:5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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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살던 제게 목자와 양 떼를 바라보면서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은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방문하는 이들은 직접 성경 문화 체험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무대에 와서도 일방적으로 듣고,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100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것이, 100번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한 번 직접 경험 하는 것이 소중함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부활절이 가깝기에, 부활절 가까운 절기였던 유월절 어린양으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유월절 어린양,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무지함의 다른 말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어린양에 얽힌 이야기를 만납니다. 몇 가지 작은 주제를 다룹니다.

▲ 때 묻지 않은 어린양의 하얀 털을 보면서, 양털 같이 희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 김동문

성경 속으로
 
어리지 않은 어린 양? 
 
양털 깎는 모습을 보면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1살 이상이 되어야 양털을 깎기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암 양으로부터 젖을 짜기 시작하는 나이도 한 살이 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한 살일까요? 사실 6개월 된 양도 어린 양, 작은 양이 아닙니다. 오늘날 무슬림이 양을 잡는 절기인 '희생제(이둘 아드하) 때 6개월 된 양이 가장 많이 잡힙니다. 그 몸집도 작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털을 깎고 젖을 짜는 나이는 한 살이 되어서부터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양이나 염소 수컷(출 12:5)이어야 했습니다. 성경과 교회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이라는 표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어린 ’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어린 양이나 새끼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기와 젖과 털을 제공하는 (청년기의) 양, 젊은 양입니다. 양들의 생애주기를 고려하면, 성년식을 치른 양인 것입니다. 
 
양털 뭉치, 양털 깎는 계절
 
양털 뭉치는 염소털 뭉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실을 뽑아내는 주밑천이었습니다. 양털은 물로 잘 씻고 잘 말려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좀벌레에 먹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양털을 깎지 않았습니다. 양털도 품질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여름부터 그 다음 봄까지 길러진 털의 품질이 좋았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양은 넉넉한 털로 뒤덮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누구나, 모든 목자가 양털을 잘 깎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털을 깎다가 양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한 양털 뭉치가 훼손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능숙한 양털 깎는 이가 있었고, 양털 깎는 집도 있었습니다. 또한 양털 깎는 계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름맞이에 해당합니다. 여름철에 양털로 인해 양들이 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털을 깎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만나면 종종 언제 양털을 깎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날이 더워지면 깎는다는 말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양털 깎는 계절’이라는 것도 우리말의 ‘곡우(穀雨’, ‘입하(立夏)’같은 절기였습니다.

▲ 양털 뭉치는 한 마리 양의 털을 깎은 것을 뭉쳐놓은 것으로, 적은 부피가 아니다.     © 김동문

(기드온이)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기드온이라는 사사의 양털 시험 이야기가 사시기에 나옵니다. 그 본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사사기 6:37)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약국에서 파는 탈지면을 떠올리며 양털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털은 양털 뭉치, 한 마리 양의 털을 깎고 그 털을 뭉쳐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 양털(뭉치)은 오래전 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불솜 한 뭉치를 떠올려도 좋을 것입니다. 이 익숙한 이야기에서 이런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털에만 물이 고였다면 그것을 짜낸다면 얼마나 되었을까요? 세숫대야로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 뭉치에 물이 가득했다면, 그 양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양털같이 희어지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 지리라" 성경의 땅을 방문하는 이들 가운데는, "아니 흰 양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모르겠네요?" 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은 경우는 그런 양 떼를 눈으로 볼뿐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성경 말씀을 다시 곱씹어 봐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 눈에 띄는 양들의 색깔은 누리끼리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은 뜻밖에도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누리끼리한 양 떼를 보고는 당황해합니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누렇게 되리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새끼 양의 해맑은 흰색입니다. 양 떼 사이에 끼어 있는 새끼 양의 하얀 털옷이 인상적입니다. 새끼 양은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계절에 더 많아 보입니다.

▲ 잠잠한 양은 양의 기질이나 특성만이 아니라 목자에 의해 제압당한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김동문

다시 생각하기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마냥, 어린 양의 이미지가 자리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는 다른 것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사 53:7) 한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그동안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양의 순한 성격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털 깎는 자 앞에 눕혀 있는 양을 보았습니다. 거의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발버둥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양의 발목이 묶여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양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의 모습은, 양의 특성이나 기질을 말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양털 깎는 자 앞에 완전히 제압당하여 양털을 깎이고 있는 양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죽은 벗겨지고, 살과 피로 분리되어 사람들의 식탁에 오른 희생 제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권력에 제압당한 채 죽임당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합니다. 마치 한 살 된 양처럼, 살과 고기를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털과 가죽을 남기고 사라져갔던 희생양처럼, 예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동화가 아닌 생생한 역사로 다시 유월절 그 저녁을, 부활의 그 첫 아침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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