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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14)- 바알이 없으면 못사는 땅에서 바알 부인하기
구약시절, ‘바알’을 풍요 주는 절대적 존재로 숭배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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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25 [07:37]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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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확신하지만 수많은 바알들에게 무릎 꿇거나 섬기며 사는 현대 성도들

▲ 비가 내리고 난 뒤에 다시 말라버린 땅, 그래서 샘과 비가 더 절실하다.     © 김동문 선교사


겨울 가뭄으로 시달리는 이스라엘에 비가 내렸습니다. 비를 위하여 정부에서 기도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 환경이 광야이든 산지나 골짜기, 평야이든 비를 필요로 합니다. 강이나 시내, 샘이나 우물이 많지 않은 메마른 들녘은 더더욱 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 비의 필요는 출애굽 이전부터 바알을 숭배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엽, 앗시리아 제국(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북쪽의 모술(니느웨)를 중심으로 확장된 제국)의 영향이 깊었던, 호세아 선지자 시절의 이스라엘, 엘리야 선지자 시절의 바알신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가나안 원주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에서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바알의 존재감이 넘쳐났을까요? 
 
바알은 주인을 뜻하는 고대 언어로 일반 명사였습니다. 우리말로 주인(어른“이었습니다. 집안의 가장(족장, 남편, 윗사람 등)도 종교에서 신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종교에서 바알은 우리가 떠올리는 바알(신)이었습니다. 그 바알은 바람, 구름, 천둥, 번개 등과 연결된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이것은 ‘비’의 또 다른 존재감이었습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의 비로서의 바알은 가나안 농경 사회에서 가장 요긴한, 모든 것의 근원이었습니다. 바알 없이 농업도 목축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알에게는 또 다른 동반자, 바알의 아내, 땅의 여신인 아세라(아스다롯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입니다.
 
바알은 남성으로서 어머니 신인 아세라(땅)에 비(정액)를 내려주고, 이로 인해 땅이 수확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알숭배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이것은 바알(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부터 생명의 씨(정액)를 받아들여 풍요를 누리거나 땅의 여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에게 생명의 씨를 뿌리는 성적 행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풍요와 번영, 다산의 행위를 종교의 이름으로 성적 행위로 드러내던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풍요가 주어지면 바알의 힘이고, 그렇지 않으면 숭배자의 죄(잘못) 때문이었습니다.

▲ 로뎀나무가 보이는 메마른 광야, 엘리야가 찾았던 환경이다.     © 김동문 선교사


성경 속으로
 
일상생활에서 바알의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호 10:1) 여기에 나오는 제단은 바알 신전을, 돌기둥은 아세라 석상을 말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무찔렀던 엘리야조차 바알의 미신적 힘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바알이 존재하지 않(다고 믿)는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호렙산으로 도망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쳐서 땅이 흔들리고 불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 자리했을 바알에 대한 공포를 떠올려봅니다. 바알은 개인의 의식 속에만 있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안에도 그의 자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요시아)는 아세라 목상을 주님의 성전에서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들어내다가, 그 곳에서 불태워 가루로 만들어서, 그 가루를 일반 백성의 공동묘지 위에 뿌렸다. (요시아) 왕은 또 주님의 성전에 있던 남창의 집을 깨끗이 없애었다. 이 집은 여인들이 아세라 숭배에 쓰이는 천을 짜는 집이었다.“ (왕하 23:6, 7) 
 
여기서 등장하는 ‘남창’은 바로 바알 제의의 끝을 장식하는 성적 의식의 수행자였습니다. 일상에서도 바알의 이름을 딴 이름을 많이 지을 정도였습니다. 풍요의 근원이 오직 여호와임에도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땅에 비를 내려 풍요와 번영을 맛보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 모든 관계의 근원은 다름 아닌 여호와임을 다시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존재감을 일상에서 이렇게 몸으로 체험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의 바알의 임재체험 행위였던 것입니다. 존재감은 그 존재가 진짜로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상의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면, 그 사람들 속에는 그 우상의 존재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알(과 아세라)은 진짜인 듯 진짜가 아닌 진짜 같은 존재였습니다. 

▲ 가장 풍성한 요단강의 수원지가 있는 곳, 상수리 나무 아래 세워진 단의 바알 신전.     © 김동문 선교사


다시 묵상하기
 
우리는 호세아서를 비롯한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비, 바알이 절실하게 필요한 환경 속에 사는 이들에게 바알을 부인하고 나 하나님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었을까요? 바일이 비를 내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 하나님 여호와가 비를 내려주는 존재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요? 바알이 없으면 못사는 땅에서 바알 부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호와냐 바알이나 너희가 섬길 자를 선택하라!”, “너희가 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머뭇머뭇하려느냐?” 이 질문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게 바알 숭배에 빠지지 않았다고 확신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 하나님을 번영과 성공의 발판으로, 풍요와 권력을 안겨주는 능력자로 믿는 경우입니다. 헌금과 예배를 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주민들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그 비슷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수많은 바알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섬기며 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대리한다고 자처하는 존재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짓된 풍요와 복이 넘쳐나는 현실 속에서 참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을 어떻게 고백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 6:6)

■ 필자 김동문 선교사는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사역했으며 <오감으로 성경읽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주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선교전략과 성경의 땅에 대해 폭넓게 조명하는 세미나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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