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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한 설교보다 나를 온전케 해주는 설교가 좋다”
성도들이 설교에서 듣고 싶은 9가지…성경 그대로를 심장과 머리로 전하는 설교를 기대
김기홍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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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27 [07:3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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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천 편의 설교를 들었고 그만큼 설교를 하기도 했다. 좋은 설교도 있었고, 나쁜 설교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듣거나 설교하면서, 나는 화려하지만 사소한 것들에 감동받기보다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점을 기억나게 해 주는 좋은 예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듣기를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배우고 싶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에 간다. 교회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성경을 나를 위해 순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을 돕는 것도 나를 돕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천사가 날개짓하며 구름 속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경은 사람들의 먼지와 모래같은 정제되지 않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씌여졌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먼지와 모래같은 삶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한다. 
 
우리는 성경을 정화시킬 필요가 없다. 성경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가 없고 성경 자체에서 모순도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인 내용들은 많이 있다. 성경에는 골치아픈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진실들이다. 우리가 그러한 골치 아픈 내용을 인정할 때 우리의 설교는 좀 더 실제적으로 느끼게 된다. 실제적인 것이 깔끔한 것보다 좋다.
 
2.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듣고 싶다.
 
나는 미국을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한다.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의 교회도 아니고 미국의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듣고 싶다.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잘못된 교회는 아직까지 없다.
 
3. 온라인에서 볼 수 없는 설교를 듣고 싶다.
 
설교자가 서로서로 배울 수 없다거나, 교단 간의 설교 일정 또는 다른 도구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가져와서 자신의 것으로 전하는 것은 게으른 일이다. 그것은 또한 도둑질이다. 교회 밖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표절이라고 한다. 우리의 윤리적 기준은 좀 더 높아야 한다. 또한 당신이 설교를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교회에 가야 하는가?
 
4. 설교자의 확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힘겨운 투쟁에 대해서 듣고 싶다.
 
나는 나보다 더 나은 것처럼 행동하는 누군가가 내게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보다 나을 수 있다. 사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신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뜻일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설교단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성경이 항상 옳다. 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겸손 말이다.
 
5. 설교자의 심장과 머리로 설교하기를 원한다.
 
준비, 공부 그리고 연구하는 것은 설교자의 도구들 중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기도, 열정과 경험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다른 것들 보다 한 가지 영역에 좀 더 치중한다. 그러나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이 두 가지 영역에 모두 힘써야 한다.
 
6. 자신의 교인들을 알고 사랑하는 목사에게 설교를 듣고 싶다.
 
거대하고, 얼굴 없는 청중들에게 설교하는 설교자들에게 여러 번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고, 알고,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그 사랑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훨씬 설교를 의미있게 해 준다. 내가 설교할 때 내 설교를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깊은 어떤 것을 알고 있다. 깊고 아름다운 어떤 것들과 깊고 어두운 것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결코 함부로 활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차이를 느끼게 한다. 
 
교회가 커질수록 개인적인 유대관계는 줄어든다. 그것은 대형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 서비스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 개인 접촉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관계는 중요하다. 나는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한명이고, 그런 목사들 가운데 한명 이다.
 
7. 성경적 윤리 기준을 취하기를 원한다.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진실하게 성경을 설교할 수 있다. 성경은 어려운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죄는 실제이고 지옥은 뜨겁고 영원함은 길다. 그러나 그 마음이 죄와 그 결과를 넘어 깨어진 설교자에게 나는 설교를 듣고 싶다. 파벌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설교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8. 심판을 이기는 은혜를 원한다.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약 2:13)”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이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인정하고 결과를 제공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위대한 설교이다. 문제를 인정하라. 그러나 나를 은혜로 향하게 지도하라. 죄와 지옥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적 진리이다. 은혜가 진리를 완성시킨다.
 
9. 설교를 듣고 특별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아니, 나는 숙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영감을 얻고 싶다. 위대한 설교는 단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온전하도록 세워주어야 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엡 4:12)은 목사의 주요 임무이다. 유창한 설교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벽한 설교는 아니지만 나를 온전하게 해 주는 설교가 그렇지 못한 유창한 설교보다 좋은 것이다.
 
* 이 글은 Christianiytoday.com에 있는 Karl Vaters의 글(9 Things I Love to Hear In a Sermon)을 한인독자들을 위해 번역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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