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특집
용서와 화해의 삶: 비텐베르크의 유대인 돼지
과거 잊지 않고 그 과거 품고 미래 향해 나가야
이성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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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6 [13:2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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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0일 주일은 독일교회 예배력에 따른 이스라엘 주일이다.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에서 하나님
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의 삶과 역사를 그리고 독일에서의 그들의 불행한 운명적인 삶을 함께 나누었다. 독일인이나 유대인 모두는 가해자요 피해자이다.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은 가해자로서 희생자이고, 또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의 피해자로서 희생자이다. “잃어버려진 사람들과 얻어맞은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존 스토트)”는 것이 돌아온 탕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돌아갈 집의 주인은 이 둘을 다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8월 28일 월요일에 독일 내에 유학 온 신학생들과 교포 2세 신학생들을 초청하여 함께 담스타트의 마리아 자매회를 방문했다. 이 자매회는 바실리아 쉴링크 자매가 독일이 패전한 후에 아버지의 집을 세우라는 부르심을 받고 폐허 속에서 일으킨 개신교 수도회이다.

이날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때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담스타트의 건물의 잔해에서 주어온 벽돌로 처음 세워진 예배실에서, 연로한 현 원장의 독일에서의 죄의 고백과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들었다. 또 이 연로한 원장은 1년 전 한국 방문을 회상하면서 한국 분단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셨다.

 
이 예배실의 강대상 정면에 달린 십자가에는 보통 십자가에는 없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 때에 가슴에 달았던 다윗의 별이었다. 이것은 새로 만든 모조품이 아니고 예술가의 작품도 아닌, 홀로 코스트에서 그것을 달고도 살아남은 한 유대인의 기증으로 달리게 된 특별한 다윗의 별이었다. 이 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2017년도에 또한 이스라엘 주일을 지키는 8월에 돋보이는 화해와 용서의 상징으로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발밑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 마리아 자매회의 이스라엘을 품고 기도하는 사랑이 작지 않음을 보았다.

이 자매회의 크뤼거 자매와 라이쁘찌히의 토마스 피흘러 목사 그리고 죠엘라는 지난 5월과 6월에 수요일마다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에서 침묵의 파수꾼이 되는 데모를 이끌었다. 그들은 부끄러워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침묵 속에서 비텐베르크에 있는 수치의 상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수치의 상은 비텐베르크의 시교회의 외벽에 부조로 달려 있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조각인 ‘유대인 돼지(Judensau)’이었다. 이것은 1305년 세워져 700년 이상 달려 있는 것으로 돌판 부조에 한 돼지가 있고, 한 유대인 랍비가 그 돼지 꼬리 아래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과 유대인들이 돼지 젖을 빠는 모습이 새겨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은 부조상으로 유대인들이 어떻게 유럽에서 멸시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마틴 루터도 이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종교개혁 초기에 유대인무시, 편견의 신학사상을 견지했다. 더 나아가 히틀러의 호로코스트는 독일이 인류에게 남긴 상처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도 현재에 1420만 명의 유대인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유대인 아버지를 두고 있거나,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1600만 명에 이른다. 유대인들이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시대 때의 학살로 1100만 명으로 줄어들었지만, 다시 1939년의 유대인 숫자인 1660만 명을 회복해 온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인종편견적인 죄와 행실을 사죄하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 돼지’ 부조를 제거해서 박물관으로 옮겨야한다는 데모를 한 것이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시의회는 유대인 비하의 조각상인 ‘유대인 돼지(Judensau)’를 제거하지 않기로 최근의 회의에서 결의했다. 비텐베르크 교회에서도 그 조각을 떼어내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수치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수치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그의 시대에서 이루어진 어두운 역사를 경고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거하자는 사람도, 제거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며, 과거에 묶이지 않고, 그러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과거를 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폄하는 인종 편견적인 왜곡된 모습도 있었지만, 유대인 자신들이 특권의식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 배척되고 그들의 마음 문이 닫혔기에 발생한 것도 있다(롬2:17-29).

바클레이 성경주석자는 1세기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거부한 것은 아무런 형상 없이 예배를 드린 것이나, 안식일에 일을 안 해서 게으르다거나, 돼지고기를 안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다른 종교들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스라엘 백성은 전통적인 사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때로는 유일신 신앙의 순수함 때문에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일상 삶속에서 언제나 가해자일 수만은 없고, 또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로마의 비아 라타의 작은 돌길의 파키노 연못에는 루터가 물통을 들고 있는 사람으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수많은 돌팔매질로 파괴되어 있어서, 지역주민의 설명을 통해서만이 루터인 것이 알려지고 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는 돼지유대인의 비하에 대한 신학적인 책임을 면할수 없는 가해자 이지만, 로마에서는 코가 부셔지고 얼굴이 뭉개져 있는 피해자인 것이다.

구세군의 윌리엄 부스는 런던 구세군의 대중 집회에서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4만 킬로미터”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부스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팔이 그것을 감싸 안을수 있을 때까지 자라가야만 합니다”라고 도전했다.

헤셀 그레이브는 “크리스천 사역자가 건너기 가장 힘든 거리는 고향에서 현지까지의 지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사이의 46cm 거리”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어디까지 자라야 할지와 무엇을 좁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어느 곳이던지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출신지에 따라서 구분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를 좁혀 가면서 사는 곳이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편견과 차별이 없는 4만 킬로미터를 품는 새로운 공동체 이어야한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주류에서 주변으로, 다수에서 소수자로 전락해가는 유럽의 기독교인이 유대인들처럼 거부되어 살아 갈 수도 있다. 이것으로 콘스탄틴교회 이전의 초기 기독교인의 사역과 생활 패턴으로 우리를 인도할 그런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다시 한 번 그들 자신이 소수종파-이방인, 순례자 그리고 이주민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알렌)”. 이것으로 유럽의 이땅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상황화속으로 들어가며, 또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춘 선교사(독일) sungchoon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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