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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 (8) - 나귀를 탄 암탕나귀 고멜 이야기
큰돈 지불하고, 가출한 아내를 나귀에 태워오는 호세아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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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5 [01:1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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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귀는 길찾는 명수였다. 양떼 앞에서 집으로 길을 찾아가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 김동문 선교사 제공

 

성경읽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읽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 들려주는 것, 보여주는 것, 전해주는 것을 공감하기 위한 ‘새롭게 읽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속 이야기에 담겨있는 '그 마음'을 느끼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야기 속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호세아서에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고멜의 말 없는 소리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호세아서를 펴는 순간 어떤 고정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나요? “음탕한 저 고멜과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너그런 주님의 용서가 내 맘을 녹이셨네..” 오래전 불리던 은혜로운 찬양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고멜을 그야말로 성적으로 방탕한 여인으로 생각합니다. 고멜이라는 이름조차도 비웃음, 조롱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남을 비웃고 욕할 때 사용하던 격한 어휘의 하나가 ‘암탕나귀’ 즉 고멜이었습니다. 암탕나귀 같은 여자(?, 우리 말의 ㅆ여자) 그렇게 불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고멜의 부모는 그에게 이런 식의 고통스런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요? 그 이름으로 불리던 고멜은 어떤 감정을 갖고 살았을까요?

 

오늘은 호세아서에 담긴 문화적 배경을 떠올려봅니다. 그동안 던지지 않았을 많은 질문을 제기해 봅니다. 성경묵상은 어떤 면에서 성경에 질문을 하는 수고를 뜻합니다.

 

성경 속으로

 

▲  나귀 한 마리에 가득 실은 짐을 호멜로 불렀다. 대략 220리터 정도였다.     © 김동문 선교사 제공

 

구약성경 호세아 3장에는 호세아가 그의 아내 고멜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림언어가 가득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이해를 위해, 몇 가지 그림 언어를 떠올려 둡니다. 당나귀, 보리 한 호멜 반, 그리고 암탕나귀라는 이름 뜻을 가진 고멜... 겹치는 그림 언어가 떠오를 것입니다.

 

나귀를 탄 암탕나귀? 호세아는 집나간 아내를 찾아오기 위하여, 엄청난 준비를 합니다. 참 호세아는 가난한 선지자였을까요? 아니면 물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호세아는 집 나간 아내를 찾아오기 위하여 은 15세겔이라는 작지 않은 돈과 오늘날 자가용에 해당하는 나귀에, 350리터가 되는 보리를 가득 싣고 길을 떠납니다. 호멜이라는 단위가, '나귀에 가득 실은 한 짐'을 뜻합니다. 대략 230리터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런데 나귀 한 짐보다 훨씬 많은, 나귀 한 짐 반이나 되는 350리터의 무거운 보리를 지고 가는 나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귀의 표정은 어떻게 다가오는가요? 호세아는 왜 이토록 넘치는 분량을 한 나귀에 가득 실고 갔을까요? 나귀 두 마리를 사용할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은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  나귀는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가장 요긴한 교통수단의 하나였다.    © 김동문 선교사 제공

 

호세아가 마련한 이 큰 비용은 어디서 난 것일까요? 자신이 갖고 있던 전 재산 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웃과 가족, 친지들로부터 급전을 구한 것이었을까요? 왜 이 정도의 비용을 마련해서 가는 것일까요?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여성의 노동력 값(몸값)은 은 30세겔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은 열다섯 세겔 + 보리 한 호멜 + 보리 반 호멜(350리터)에 다시 돌아옵니다. 여기서, 보리 350리터 정도의 가격이 얼마나 되었는지, 은 15세겔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얼추 그 정도였기에, 호세아가 고멜의 몸 값으로, 챙겨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귀는 호세아의 것이었을까요? 며칠 길을 갔을까요? 고멜을 찾으러 오가면서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었을까요? 고멜을 찾으러 가는 호세아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무엇을 느꼈을까요? 고멜을 다시 만나서 무슨 말을 처음 했을까요? 물론 앞으로는 한 눈 팔지 말아달라는 부탁의 말이 호세아서(3:3)에 적혀 있기는 합니다. 고멜에게서 무슨 말을 처음 들었을까요? 고멜은 호세아를 다시 만나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무슨 말을 했을까요? 묘하게도 호세아서에서 고멜의 육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 호세아가 가지고 간 것은 다 사라졌습니다. 은 15세겔도 보리 350리터도 다 지출했습니다. 호세아가 가져간 나귀에는 암탕나귀(고멜)이 앉아있었습니다. 당나귀가 힘이 겹도록 무겁게 호멜을 싣고 간 호세아는, 당나귀에 넘치는 호멜 대신에, 고멜을 실고 돌아옵니다. 당나귀도 훨씬 안정적인 느낌입니다. 고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호세아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는 그림언어가 다가오는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세아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고멜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무엇을 서로 느꼈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갔을 그 대화를 떠올려봅니다, 아마도 말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모릅니다.

 

다시 묵상하기

 

▲     © 김동문 선교사 제공

 

나는 일상에서 고멜이 되고, 호세아가 되고, 동네 주민이 되고, 나귀가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때로 그 말없는 대화를 떠올려봅니다. 말없는 대화, 아니 적혀있지 않은 그 깊은 대화를 생각합니다. 성경은 너무 일상적이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 사모곡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2남 1녀. 큰 아이의 이름은, '여주이천평야 같은 뜻의' 이스르엘, 둘째 딸의 이름은, '미움 덩어리' 인 로루하마, 셋째 아들의 이름은, 오랑캐를 뜻하는, 「짱개」「짱꼴라」「되놈」「떼놈」「땟놈」으로 풀 수 있는 로암미였습니다. 누가 자식에게 이렇게 험한 이름을 붙일까요? 그 이름을 부르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을까요? 그렇게 험한 이름으로 불리던 자녀들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을까요? 자녀들의 이름 안에는 그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기대감과 그 자녀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어떤 존재(하나님)에 대한 부모의 바람을 담곤 합니다.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그 시대의 답답한 분위기를 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과 소망이 없던 시대를 느낍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이 이렇게 불리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고멜의 말없는 소리에 주목해 봅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시는 그 하나님 마음을 감히 헤아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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