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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5) - ‘선한 목자'는 아주 격한 말이었다.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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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5/10 [06:37]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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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문 선교사 제공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는, 사회적 언어, 시대적 언어가 있다. 사회상을 반영하는 언어로, 그 시대를 공감하지 못하면, 그 느낌을 잘 알기 어려운 말들이다. ‘7포 세대’, ‘루저’ 라든지, ‘88만원 세대’, ‘된장녀’, ‘엄친아’, ‘도시남’ 같은 다양한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전에는 사용안하다가 어떤 이슈나 유행을 타면서 새로운 언어로 자리 잡은 경우들이다. 이런 사회적 언어 가운데는 된장녀, 루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말도 있고, 좋은 뜻을 담은 말도 있다. 물론 88만원 세대처럼 중립적으로 어떤 계층을 지칭하는 말도 있다.
 
"너 같은 x는 뭐 같은 x이나 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말을 해본적도 있을 듯하다. '너 같은 x는 거렁벵이나 되라' 거나 '빌어먹을 x이 되라'고 하면 정말 기분 상할 수밖에 없다. "참 너는 누구 같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누구'에 대한 평판이 좋으면 그것은 덕담이 될 것이다. '너 누구 닮았다'고 누군가와 나를 비교할 때, 그 누구가 좋은 존재이면 기분이 좋겠지만, 그 반대는 그야말로 기분은 '꽝'이다. 때로 분노조차 느껴질 것이다. 평판이 안 좋은 인물과 나를 비교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목자’. "나는 선한 목자"라는 표현도 사회적 언어이다. 사실 우리에게 '목자'라는 이미지는 안정감 가득한 용어로 다가온다. 어린 양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목자의 이미지는 너무 친숙하다. 그런데 그 시대에 사회적 언어로서 ‘목자’는 격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었다. 예수가 언급한 선한목자는, 요즘의 표현을 빌리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진보적 보수주의자 같은 모순된 단어의 조합이다. 거기에 예수의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성경 속으로

 

 © 김동문 선교사 제공


예수님 시대에 직업 어부나 직업 목자들의 평판은 정말 좋지 않았다. 목자들에 대한 평판은 바닥을 쳤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거주자들의 시선에 의존한다면,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욕을 먹는 대상이었다. 예수 시대에 목자,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등은 부정직하고 도벽이 심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대표적인 천직으로 취급받았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요한 10:12~13).
 
이 본문은 목자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언어를 반영하고 있다. 양이나 염소, 낙타나 소를 소유한 사람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직업 목자 즉 삯군 목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이미지가 가득했다. 물론 도시 밖에 광야에 살면서 직업으로 목축을 하던 유목민들도 무시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도시 안팎에 살면서 목자를 직업으로 가졌던 삯군 목자들이 받은 수모나 차가운 눈초리는 만만치 않았다.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양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들의 삶의 특성은 다분히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여야 하는 거친 직업이었다. 위험한 상황은 광야의 맹수들의 공격이나 양떼를 노략하려고 하는 도적떼의 공격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삯군) 목자들은 무장이 필요했다. 부정직하고 도둑질하고 남의 땅을 무단히 침범하고 그 땅의 소산물을 슬쩍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는 이들, 이런 이미지들은 그 시절 삯군 목자를 대할 때 주어지던 것이었다. 심지어 목자로부터 직접 양털이나 젖이나 양 새끼를 사는 것도 삼가야 했다. 남의 것을 슬쩍한 장물(臟物)일 경우가 많았다고 구설에 오르곤 했다.
 
다시 묵상하기

 

 © 김동문 선교사 제공

 
예수님도 당시 삯군 목자에 얽힌 당시의 나쁜 평판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런 평판 때문에 목자들은 당시 평범한 시민들이 누릴 수 있었던 권리였던 재판관이 될 수도 없었고,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다. 목자들은 쓸모없는 존재들이고, 구덩이에 빠져있어도 그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무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목자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로 부르셨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 하시면서, 특히 베드로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시면서 목자가 되라고 하셨다.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한 21:15~17) 어부였던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주님은 베드로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던 목자의 자리로, 그것도 사람을 돌보고 지키는 목자로 부르셨다. '나는 목자다'는 고백은 '나는 도둑놈이다' 또는 '나는 사기꾼이다'는 고백 못지않았던 시대에 다소 충격적인 부르심이었다. 더 좋은 명칭과 더 좋은 호칭도 있었을 텐데.. 없었다면 새로운 멋진 호칭을 붙여도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자극적인 도전을 하셨을까. 선망의 대상이 아닌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의 대상의 이름을 가지라는 것이다. 너는 착한 루저가 되라, 착한 도둑놈이 되라, 아예, 여기서 '착한'이란 수식어를 빼야할 것 같다. 그냥 이미지로는 도둑놈, 사기꾼, 루저... 가 되라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이런 부르심은 사회적인 평판과 맞서라는 뜻도 있었을 것 같다. 명예와 존경이 넘치는 자리가 아니라 불명예와 부끄러움이 있는 자리일 수도 있는데, 네가 그 길을 가야한다는 그런 너무나도 직설적인 요청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교회나 단체에서 목자라는 직분도 있고, 목사라는 직책도 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축하를 받으시면서 시작된 예수님의 생애는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준 삶으로, 그리고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 같은 백성들을 먹이고 치는 새로운 목자들을 부르심으로 마무리된다. 이들에게 목자가 되라는 요청은, '목자'라는 직업에 대한 이런 사회적 평판을 바탕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증거능력 부재의 존재인 목자, 투명 인간 그 자체였던 목자, 예수의 제자로 새 출발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요청한 것이다. 다분히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호칭으로 자신을 일컬으면서도 자기 비하가 아닌 당당함과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했어야 했다. 그렇다, 나는 목자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삯군 목자다. 나는 선한 삯군 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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