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교계
“종교개혁으로 부터 배우는 7가지 목회적인 지혜”
프랭크 제임스 BTS 총장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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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4 [23:0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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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 고택원 목사)가 주최하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컨퍼런스가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4월 6일부터 2일간 필라 기쁨의 교회에서 열렸다. 첫날 프랭크 제임스 총장(비블리컬신학교, BTS)는 "종교개혁이 현시대 교회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조영천 목사의 통역으로 하며 “종교개혁으로 부터 배우는 7가지 목회적인 지혜”를 나누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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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제임스 BTS 총장과 통역 조영천 목사 ⓒ KimDongWook500.Com 
 

한인교회와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전도사로 한인교회에서 4년간 사역했다. 그 때문에 한인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 요청받은 주제는 종교개혁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저는 종교개혁으로 부터 배우는 7가지 목회적인 지혜에 나누고자 한다.

 

저에게 실질적인 주제를 요청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종교개혁과 개혁가에 대한 아주 많은 오해들이 있다. 그 오해중의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이 전문적인 신학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그들은 모두 목사였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여러분 종교개혁에서 어떤 배움을 얻기 원한다면 특별히 칼빈으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다. 1549년 칼빈이 동료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이 편지에서 칼빈은 목회자로서의 책임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슬픔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눈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목회자는 좋은 신학자이고 좋은 신학자는 또한 좋은 목회자이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종교개혁과 거리가 먼일이 될 것이다.

 

1.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항상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기독교 학자로서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한다. 심지어는 우리를 좀 불편하게 하는 그런 사실이라도 그러하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목적을 이루실 때 죄인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통해 그의 선하고 좋으신 계획을 이루신다. 이것이 우리가 종교개혁에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목회적 교훈이다.

 

종교개혁가들도 죄인이었다. 저처럼.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루터가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생애동안 루터는 유대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느 순간에는 그 감정에 격해져서 유대인들은 독일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400년이 지난 후에 히틀러가 루터의 그 말을 인용했다. 어느 경우에 루터는 이중결혼을 허용한 적도 있었다. 정치적인 지원을 받기위해 군주였던 필립의 이중결혼을 묵인해주기도 했다.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죄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칼빈 역시도 죄인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중세교회를 비판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쯔빙글리 조차도 설교하는 중에 자신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그래도 죄인들을 사용하신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우리도 죄인이지만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죄를 변명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의 죄를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들을 아주 높은 위치로 올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개혁가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떤 종교개혁가도 자신들을 영웅으로 높이지 말라고 할 것이다. 루터는 루터파라 말하지 말라고 했고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루터는 이렇게 아주 실감나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냄새나고 구더기와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내 이름을 빌려서 루터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굉장히 중요한 영적 원리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위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신다.

 

2.

 

종교개혁가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자신이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거의 마지막 날에 임할 선지자적으로 생각했다.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에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스스로를 생각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가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한쪽 발은 중세시대에 다른 한쪽 발은 근대시대에 걸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루터에게는 여전히 중세사람들이 고수하고 있었던 사상들이 있었다. 성모마리아가 흠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으며 원죄없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중세 카톨릭의 교리였다. 그런데 루터는 그 교리를 계속해서 고수했다. 그 외의 많은 중세 교리들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루터외에 다른 종교개혁 신학자들도 마리아가 계속해서 처녀로 살았다고 하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는 칼빈도 이 교리를 믿었다고 하는 증거들이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종교개혁은 전환기였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한쪽 발은 중세시대에 다른 한쪽 발은 개신교의 입장으로 걸치고 있었다. 

 

저는 종교개혁가들은 하나의 개척자였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중세의 지난 교리들을 벗어던졌다. 그렇지만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어떤 사람도 한 번에 완전히 바뀌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은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아주 흥미롭게도 루터가 처음 던졌던 질문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터가 카톨릭만 자극한 것이 아니라 다른 개신교 개혁자들도 자극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더 다듬도록 했다. 이러한 전환기를 이해하기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세계는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받거나 배울 것이 없을 정도로 다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교만한 태도가 될 것이다. 항상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은 겸손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성장할 여지가 항상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3.

 

여러분들이 놀랄지도 모르지만 모든 종교개혁가들이 똑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아주 많은 견해 차이가 있었다. 작은 견해차이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는 큰 차이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특별히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는 아주 큰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루터는 쯔빙글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이단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는 거짓 선지자, 사탄의 앞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성찬에 대한 견해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교황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많은 차이점들이 가려지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교리중의 하나는 이신칭의 교리이다. 세부적인 내용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이 중요한 교리에 대해서도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심지어는 루터파 내에서만도 12개의 서로 다른 칭의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이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루터와 개혁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신학자에 따라 이렇게 중요한 교리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전환기였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루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히 종교개혁이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생각했다. 루터의 칭의 교리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생각해 보라. 루터의 칭의 교리는 자신이 겪었던 개인의 영적 문제 때문에 생겼다. 루터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영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자기 자신을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 생각 때문에 불면증과 우울증도 겪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루터는 자기는 정말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고 싶다고 고백했다. 루터는 “비록 내가 흠 잡을 것 없는 수도사로 살았지만 나는 의로우신 하나님 특별히 죄인들을 벌하시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루터는 자기가 겪는 투쟁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하나님과 그런 투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많이 일어난다. 루터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여러가지 고투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투쟁속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발견했다. 루터는 ‘놀라운 교환’이라고 한 것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이 교환은 그리스도와 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이다.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는 죄와 허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의로움이 서로 교환된다고 루터가 말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가져가시고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 교리로 인해서 루터는 마음의 큰 위안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위대한 교환은 믿음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했다.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그런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루터는 칭의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 당시에 혁명적인 복음의 재발견이었다. 

 

단 한가지의 종교개혁가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양한 종교개혁들이 있었다. 학자들은 개신교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루터주의/루터파이고 다른 가지는 개혁주의/개혁파이다. 루터파와 좀 다른 분들이 개혁파에 있었다. 루터파는 한사람 루터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개혁파의 근원은 한사람에게 기원하지 않았다. 이 개혁파 진영을 태어나게 한 4명의 중요한 개혁가가 있다. 칼빈이 그중 한사람이었다. 칼빈의 멘토였던 마틴 부쩌와 취리히 신학자였던 불링거가 있었다. 제가 많이 연구하고 책도 썼던 피터마터 버미글리라는 사람도 있다. 저는 모든 강의에서 피터마터 버미글리를 언급한다. 리차드월드 라는 사람은 이 4명이 개혁주의를 체계화시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1세대 종교개혁가였고 나머지 4명은 2세대 종교개혁가들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2세대 종교개혁가들은 루터를 존경했지만 루터의 생각을 더 다듬으려고 했다. 칼빈은 루터에 대해 존경심을 피력했지만 루터와 자기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 중요한 칭의에 있어서도 루터파와 개혁파와 사이에 차이점이 나타난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와 성화가 동일하다고 이해했다. 루터는 그것에 반대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가능하면 멀리 분리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많은 개신교인들로 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루터의 교리가 자칫하면 구원받았음에도 비도덕적인 삶을 여전히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악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용어로 반인격주의라는 사조가 일어났다. 루터와 루터파에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비판이었다.

 

2세대 종교개혁가들은 개혁주의 진영에 있던 사람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된 것으로 나누면서도 가능하면 둘 사이를 가까이 연결하려고 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강조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이 결코 별개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개혁주의 진영의 칭의론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칼빈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리스도에 속했다,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당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에 근거해서 칭의 교리를 칼빈은 설명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했기에 두 가지 결과를 유래한다고 했다. 칼빈은 이중적인 은혜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유래한 첫째 결과는 법적인 칭의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에게 전달되고 그로인해 그 죄인은 법적으로 의롭다 라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부터 유래한 첫째 결과는 칭의이다. 그렇지만 칭의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칼빈은 성화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단순히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함을 받는 것만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 구별된 일이기는 하지만 항상 그 둘은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의롭게 된 사람은 반드시 거룩해지는 그런 과정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터 목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교리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귀조차도 그 일은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교리를 통해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칼빈이 강조했던 것이다.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를 보면 칼빈은 칭의라는 이슈를 다루기전에 먼저 성화라는 주제를 다룬다. 즉 그런 구조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는 거룩해지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정말 목회적으로 유용하다. 저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었는가? 여러분들이 정말로 개혁주의 교인이라면 여러분은 변화할 것이고 그리고 경건함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4.

 

이것은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해야할 문제이다. 종교개혁은 아주 올바른 화해를 증진의 교훈을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내부적인 분쟁이 많다. 한인이민교회에 사역한 적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잘 안다. 그렇지만 미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인이민교회에 대해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잘 알고 있는 주제가 이것이다. 2세들의 조용한 탈출이라는 것을 안다. 2세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늘날 한인이민교회에 아주 가장 큰 과제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리치아웃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종교개혁으로 부터 그것에 대한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화해를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1541년에 있었던 놀라운 일을 말씀드리고 싶다. 코탈리니라는 카톨릭 추기경이 있었다. 그 추기경은 바울서신을 읽으면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기의 구원을 오직 100%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했다. 그리고 루터의 주장을 접하고 루터가 말했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는 로마 카톨릭 추기경이었다. 그는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카톨릭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코탈리니 추기경은 개신교도들과 화해를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카톨릭 교회내에서도 개혁모임을 시작하기도 했다. 종교개혁 전체 기간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중의 하나였다. 

 

루터와 칼빈의 글을 읽고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인 로마 카톨릭 학자들이 있었다. 제가 말씀드린 피터마터 버미글리는 그 그룹으로 부터 유래한 사람이었다. 코탈리니 추기경은 1541년 루터에서 메세지를 보내 만나서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다시 한 번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함께 모였다. 카톨릭 측에서는 그를 비롯해서 여러 신학자들이 참가했다.  개신교 측에서는 루터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필립 멜란히톤이라는 신학자를 보냈다. 그리고 마틴 부쩌와 젊은 칼빈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 그 모임의 목적은 가능하다면 두 진영사이에 화해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의하기 원했던 여러가지 교리를 아젠다로 세웠다. 하나님은 온세계에 대해 주권적이시라는 것에 동의했으며,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동의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부분도 동의했으며, 칭의 교리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1541년 카톨릭 신학자와 개신교 신학자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칭의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았지만 성찬에 대하서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41년이야말로 개신교와 카톨릭이 결정적으로 분리되게 된 시점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정말 종교개혁 기간중 흥미로운 시기였는데 그것은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4개 조문을 붙이고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로마 카톨릭과 대화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나 되고자 했다. 비록 회담은 실패했지만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종교개혁가들은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분열을 해소하고 자하는 소망이 있었다.

 

5.

 

이것은 성찬에 대한 내용이다. 1549년 개혁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린 부분이 있었다. 취리히에 있는 개혁가와 제네바에 있는 개혁가들이 성찬에 대한 의견에 차이를 보인 것이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분리였다. 1549년 제네바의 칼빈이 취리히에 있는 불링거를 찾아간다. 성찬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취리히 일치라고 하는 문서에 함께 서명했다. 그들은 일종의 타협안과 같은 문서를 만들어서 취리히 사람도 제네바 사람도 우리의 생각과 맞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문서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그런데 그 문서의 중요점은 그들이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무시하고 일치를 보이는 점을 더 집중했다는 점이다. 이 일치가 중요한 이유는 문서로 인해 개혁주의 진영내부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하나 됨의 장벽에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불링거와 칼빈이 그때 만나서 의견일치를 보지 않았다면 개혁주의 진영 내에서 하나 되는 일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즉 칼빈의 입장에서 아주 유연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사로 의견조율하는데 있어서 목회적인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도 몸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그 목적을 위해 의견 조율을 하는 것이다.

 

6.

 

종교개혁가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은 교회개척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사 책을 보면 종교개혁가들이 선교하고 전도하는 일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혁진영에 대한 오해이다. 개혁주의 진영 특히 칼빈은 교회개척의 중요성을 아주 많이 강조했다. 칼빈이 활동했던 시기에 프랑스에서 극심한 핍박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핍박을 받은 사람들은 프랑스 언어를 사용하는 제네바로 피신을 왔다. 그 프랑스 이민자들은 제네바에서 환영을 받았다. 칼빈도 외국인들을 환영하는데 큰일을 했다. 10년 사이에 제네바 인구가 두 배로 늘었다는 기록을 본다. 프랑스와 이태리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네바를 일종의 피난처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에 온 난민들은 칼빈이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목사였던 칼빈은 일주일에 5번을 설교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들이 칼빈의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조국을 위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칼빈이 와서 자신들을 훈련시켜주고 다시 프랑스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칼빈은 흔쾌히 동의했다. 설교하는 것을 훈련시켰으며, 교리를 가르쳤으며, 전도하는 법도 가르쳤다. 그들이 준비되었을 때 칼빈은 그들을 축복하며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보내기만 하도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소통했다. 심지어는 칼빈이 죽는 순간까지 교류를 했다.

 

프랑스로 돌아간 많은 개신교인들은 순교자가 되었다. 제네바에 남아있는 고문서를 보면 칼빈이 프랑스로 돌아간 교회개척자들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핍박받는 그 시기에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하는 목회적인 지혜가 편지에 많이 들어있다. 칼빈의 교회개척에 대한 목회적인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들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다. 연구에 의하면 1555년까지 칼빈은 5개의 교회를 도왔다. 4년 뒤인 1559년에는 프랑스에 있는 교회가 100개로 늘어났다. 1562년이 되었을 때 2,100개가 넘는 교회가 프랑스에 세워지게 되었다. 7년 사이에 칼빈과 동료들이 2,100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전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칼빈에서 다시 보낸 편지들을 보면 프랑스 교회가 어떻게 부흥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 편지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하게 되어 매주일 3차례 설교를 하고 있고 5천명이상 사람이 모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편지는 교회가 크게 성장해서 8-9천명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다는 편지도 있다. 칼빈은 정말로 교회개척에 대해 믿었다. 프랑스에 살던 로마 카톨릭 사제의 편지도 남아있는데 그는 제네바에 대해 원망을 많이 하며 제네바에 온 목사들이 모든 도시에서 설교를 많이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갔고 이 도시는 이단자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일하지 않으면 끝장났다고 말했다.

 

칼빈은 단순히 프랑스에만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헝가리, 여러 유럽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칼빈은 2명의 선교사를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에 파송했다. 프랑스에서 박해가 심했기에 박해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지역을 프랑스 사람들이 들이 찾고 있었으며 바로 이시기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떠났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종교개혁으로 부터 내려오는 유산이다. 칼빈이 그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동기가 무엇인가? 칼빈은 그것이 우리의 크리스찬들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도를 단지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나누라고 알려주셨다고 말했다.

 

7.

 

저는 오늘 말씀드린 것 외에 다른 주제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지만 말씀의 마지막을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유산에 대해 나누고 싶다. 종교개혁은 단지 머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칼빈은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교리이며 머리로 다 이해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온 영혼과 심령이 그것을 붙잡을 때만 진정한 기독교 교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다. 머리만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세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라틴어 구절이 있다 그것은 “항상 똑 같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구절을 좋아했던 것은 자기들이 있는 중세교회가 영원토록 변함없는 늘 동일한 교회임을 강조하는데 사용했다. 특히 변하지 않는 교회권위를 사용하기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은 전혀 다른 라틴어를 사용했다. 개혁가들은 “항상 개혁해 가는 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이 저와 우리들에게 주어진 종교개혁의 유산이다. 우리는 항상 개혁해 나가는 교회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 저는 박사학위가 2개있지만 그렇지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부분도 많이 남아있다. 그렇기에 저는 항상 개혁해 간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신앙과 경건한 삶에 있어서 항상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항상 개혁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아멘넷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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