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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어느 간호장교의 눈물의 편지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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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04 [01:2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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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40여 년 동안 인연을 이어온 87세 고령의 6.25 참전 간호장교이셨던 분으로부터 가슴이 저린 여러 장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와이오밍 주에서 홀로 사시는 한국의 육군 소령 출신의 L 여사님이 자신의 장례식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건강하셔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가까운 시일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L 여사님은 평생을 전문 의료인으로 살아오셨던 분이시다. 필자가 여사님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이었다.

 

남가주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Long Beach에서 살던 어느 날 오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흰색의 고무신을 신으신 채 머리에 무거운 보자기를 이고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한국 할머니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민자가 많지 않았을 때였다. 공식적인 집계로 LA 카운티에 한국인이 3-4천명이 살았던 때였던 것이다. 더구나 LA에서 멀리 떨어진 Long Beach 시에선 길을 가다가 교포를 만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서 할머니에게 간 것은 머리에 올린 물건이 너무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할머니는 버스도 타실 줄 모르는 분이셨다. 물론 영어도 한 마디도 하시지 못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계속 걸어야 하셨던 것이었다.

 

70년 대 초 혼자 사시는 딸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셨다. 집에만 계시기엔 너무 답답하셔서 가끔 홀로 있을 때는 길을 따라 걸으셨던 것이다. 그 날도 갔던 길을 되돌아 큰 길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집이 나온다는 것만을 아시고 앞을 향하여 걷고 계셨던 것이었다.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평소 오가면서 눈여겨 보아오던 넓은 공터에 무성하게 돋아난 봄나물을 뜯어가지고 가시는 길이었던 것이다. 만났던 곳에서 집까지 가려면 4-50분은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걸어야 하는 길이었기에 차를 타고 가시는 동안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나를 그대로 보내지 않으셨다.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성스런 식사를 대접하셨던 것이다. 그때 먹었던 닭 미역국은 평생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별한 맛이었다. 그 후로 할머니의 가족과 필자는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 댁을 고향의 어머니 집처럼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날이면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 인연이 발전하여 할머니 가족과 지금까지도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모래알 하나를 드리고 할머니와 그분의 딸 L 여사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사랑과 축복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자신의 장례식을 말과 글로만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가 L 여사님의 부음 소식을 들으면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세세하게 준비를 해 놓으신 것이다. 장례식을 위해서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남기신 것이다. 평소와 같이 자신의 사후 문제에 대해서 생각의 생각을 하고서 한 치의 실수가 없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문서로 해 놓으신 것이다. 자신이 어느 순간에 운명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갈 곳은 와이오밍의 어느 장의사이며 그곳에서 친지들과 가족들이 모이면 장례식을 필자가 인도한 후 시신은 곧 바로 화장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장이 완료되면 필자가 고인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시고 가서 국립묘지에 안장을 할 수 있도록 절차와 처리에 대해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받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조국 대한민국과 남을 위해서 희생하시며 사셨던 분이셨다. 국가를 위해서 청춘을 바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분이셨다.

 

이민자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도 자신의 행복보다는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분이셨다. 십 수 년 전 필자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L 여사님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보고서 놀란 일이 있었다. 여인으로서 기초적인 화장품도 가방 속에 지니고 다니시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양발은 구멍 뚫린 것을 서툰 바늘 솜씨로 이리저리 얽어 맨 것을 신고 계셨던 것이다. 그 때 필자가 드린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제는 그만 하셔도 됩니다. 이제는 본인을 위해서 사셔도 됩니다. 어려서 너무 가난하게 사셨던 것이 습관화 되셔서 먹는 것 입는 것까지도 절약하며 사셨던 것이다.

 

불현듯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신 여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기가 막히고 슬퍼하였을까를 생각할 때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던 것이다. L 여사님! 자랑스럽습니다. 멋있게 사셨습니다. 아름답게 사셨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우리의 곁에 지금까지 계셔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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