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16) 슈말칼덴 동맹 및 신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
김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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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08 [14:4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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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칼덴 동맹
 
16세기 종교개혁은 전통과 성경권위에 대한 싸움이다. 전통을 믿고 따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경을 믿고 따르는 개신교회와의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종교 회담을 통해서 간격이 좁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가톨릭과 비텐베르크의 개신교 사이의 골은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만 갔다.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했다. 이때 황제 칼 5세는 분명하게도 다수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편을 들었다.

▲ 루터가 머물렀던 Wilhelm House     ©뉴스파워 김현배
 
황제는 루터교를 따르던 지지자들을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변증적으로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고백서는 1531년 4월 까지 철회하도록 기간을 주었다. 또한 황제는 보름스 칙령이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며 모든 지역에서의 교회적 변화는 원상태로 돌려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교리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나 개신교의 책을 소유하기만 해도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던 독일은 제후들이 각각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개신교의 신앙을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황제의 결정에 대해 루터는 크게 실망했다. 사실상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정부에 대한 폭력 저항을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농민 전쟁 때도 로마서 13장 말씀처럼 정부를 향한 순종이 성경적으로 명령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을 금하였다. 하지만 황제에 대해 실망한 루터는 이때부터 정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저항의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이때 독일의 루터교 제후들이 힘을 얻었다. 그들은 황제에 맞서기 위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다.
 
1531년 2월, 개신교 제후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독일 중부지역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모였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할 것을 약속하면서 직접적으로 황제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다. 이 연맹의 주도적 인물은 허센의 제후 필립 공작(Philipp, 1504-1567)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I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였다. 거기에 6명의 다른 제후들과 10명의 도시 대표들이 가세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한 도시는 안할트(Anhalt), 막데부르크 (Magdeburg), 브레멘(Bremen), 포메른(Pommer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하노버(Hannover), 함부르크(Hamburg),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켐프텐(Kempten),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등이다.
 
황제의 친 가톨릭 정책은 결과적으로 루터 지지파들을 더욱 결속시켰던 것이다. 결국 슈말칼덴 동맹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1532년 7월, 뉘른베르크에서 터키의 침공에 대한 방어의 필요에 쫒긴 황제 칼 5세와 슈말칼덴 동맹은 임시협정을 체결한 후에 휴전에 들어갔다. 가톨릭 지역과 개신교 지역의 종교적 평화를 위한 협상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개신교 신앙고백을 따르는 영주들로 이루어진 슈말칼덴 동맹과의 관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로 점철되어 갔다. 당시 이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독일 동부 전 지역과 독일 북부 대부분이 루터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지역들에서 종교개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 교회의 영역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어 나갔다.

▲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한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뉴스파워 김현배
 
슈말칼덴 신조
 
그 후 5년이 지났다. 황제 칼 5세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인 북 이탈리아 만투아(Mantua)에서 1537년 5월 23일 공의회를 개최했다. 복음주의 진영 곧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루터에게 만투아에서 열릴 총회에 제출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루터는 여러 조언자들의 협력을 촉구한 뒤, 부탁 받은 대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을 작성했다. 루터는 슈말칼덴 동맹에게 신앙고백의 기반을 제시하고자 1536-1537년 사이에 개혁자들과 함께 슈말칼드 조항을 작성하였다. 이것이 슈말칼덴 신조(Schmalkald Articles)이다.
 
실제로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성경적인 기독교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특별히 개신교의 교리를 예리하게 정리했다. 주요 핵심 내용은 “이신득의, 죄, 율법, 회개, 복음, 세례, 연옥, 순례, 수도생활, 성인들에 대한 기도 단죄, 제단의 성례, 신앙고백, 파문, 서품과 소명, 사제들의 혼인, 교회, 수도 서약들, 인간 전승들, 미사의 정죄, 수도원 삶의 해로운 성격, 교황청,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회개,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 비판, 마귀” 등이다. 특히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이자 마귀의 사도로 낙인찍는다. 그는 과거의 신조들을 간략히 재 확증하면서 어떤 양보도 없었다. 루터는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에 이어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하였다.
 
루터가 이 문서에 서명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장 결석으로 인해 문서를 서명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537년 루터가 슈말칼덴에서 개신교 영주들과 더불어 공의회의 대표 파견 문제에 대해서 협의하고 있던 때에 심각한 결석증이 발작했다. 이 모임에서 루터는 신장 결석과 담석증으로 방석에 누워 중병환자로서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은 1537년 루터가 작성한 슈말칼덴 신조를 채택하지 않았지만, 슈말칼덴 신조는 종교개혁의 강령을 이루었다.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한 루터가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신조와 교리의 중요성이다. 그동안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교회에 전해 내려온 기본적인 신앙, 즉 신조를 잘 정리해 주었다. 그는 개신교 신조에 대해서는 어떤 양보나 타협도 없었다. 신조에는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이 분명히 나타난다. 신조는 신약이 경고한 새로운 사상, 이단, 거짓교훈과 정통 기독교를 구분시켜 주는 신앙의 테두리이다. 즉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을 구별 짓는다.

▲ 루터가 설교했던 St. Georg 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신조는 비교적 짧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쉽고,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 준다. 루터의 공헌이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슈말칼덴 신조’이다. 루터 지지파들이 모여 결성한 동맹의 중심지가 되는 슈말칼덴에 있는 성 조지 교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설교했다.
 
슈말칼덴 전쟁
 
로마 가톨릭과 루터지지자들로 조직된 슈말칼덴 동맹과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1531년에 시작된 슈말칼덴 동맹은 15년 동안 서로 연대하였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한 칼 5세는 독일의 종교개혁 세력을 억제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 권세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던 황제는 권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루터도 이것을 예측했다. 루터는 개신교 진영이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루터는 제후들에게 이제까지 성취한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제는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개신교 제후들은 당연히 참석을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인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군사행동을 명한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는 가운데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5개월 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1546년 7월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동맹군은 군사적으로 황제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후들 간의 분열과 무능력으로 인해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Muhlberg)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은 패배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비텐베르크에서 참수되었다. 루터의 도시는 개혁자가 죽은 후 15개월 만에 패배라는 수치를 당했다. 전쟁에서 패한 많은 도시들이 프로테스탄트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덴 동맹’은 독일 내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과 황제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 상황이 빚어졌다. 마침내 황제도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말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1555년 9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종교평화회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황제와 루터 지지파 사이에 대화합이 이루어지면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개신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이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칼 5세가 아니라, 그 동생 페르디난드 1세이다. 이 화의의 핵심은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아무런 간섭 없이 자기 영지 안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루터교 프로테스탄트는 제국의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국가종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가톨릭과 루터 복음주의라는 두 신앙고백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은 끝났다. 독일은 신앙고백들의 시기로 들어갔다. 실로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은 이후 38년 만에 이루어진 개신교 측의 승리인 것이다. 드디어 개신교회가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개신교의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아우그스부르크 구시가지 남쪽 끝의 울리히(Ulrich) 광장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를 기념하여 지은 울리히 아프라 교회가 있다. 작고 아담한 탑이 보이는 개신교회다.
 
루터파의 신앙고백서 - “일치신조”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해 동안 루터의 제자들 간에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루터교회는 루터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1580년에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작성하였는데, 루터교회의 기본 원리를 잘 보여준 신앙고백이다. 루터파를 이끄는 성직자와 군주, 귀족과 시의회가 일치신조서를 채택하였다. 루터교회의 모든 공식 교리문서들이 포함된 일치신조서는 전 세계 루터파의 신앙 고백적 표준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일치신조는 루터가 주장한 인간 의지의 노예상태 교리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재천명했으나, 그의 예정론은 누그려뜨렸다. 루터의 영향력은 루터파의 신앙고백서들을 종합해 놓은 일치신조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개신교의 정통 신학에서 각각의 신앙고백서는 상당 부분 루터에게 빚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렇다.
 
 
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비전교회, GMS 독일 선교사,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뉴스파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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