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사이비
“현몽·접신은 사이비 교주가 사용하는 수법”
기성측 교계 최초 최태민 정식 보고서 발표
정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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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3 [03:19]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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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 씨(사진 왼쪽)
 

교계 최초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여성삼 목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김철원 목사)가 고 최태민 씨의 실체를 분석한 보고서를 교단으로서는 최초로 내놓았다. 최 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서 국정 농단의 주역으로 비판받고 있는 최순실 씨의 선친이다. 김철원 목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교계가 사이비 종교인 출신 최태민 씨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됐다”며 “최태민 씨가 활동하던 시대에 목회자들이 구군선교단 등에 가서 단체에 축사하고 줄서기를 한 사람들을 파악해 그들도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기성측은 해당 보고서에서 최태민 씨가 최상훈, 최봉수, 법명 퇴운, 공해남, 방민(계시를 받았다며 사용한 이름), 원자경 등의 이름을 사용했고 1973년도에는 영세계 칙사관이란 곳을 설립, 꿈을 이용한 선무당 행세를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 붙여놓고 ‘나무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며 “그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고 분석했다. 영애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기성측은 육영수 여사의 피살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애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냈는데, 최태민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

“1975년 2월, 최태민은 심적 혼란을 겪던 박근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그 편지에는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며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남)했던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기성측은 현몽이나 접신은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정신적인 주종관계를 만들어 통제하려고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현 시국에 대한 제언도 담았다. 기성측은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며 “이제부터 전국 교회와 지도자들은 만병통치나 만사형통을 앞세우며 비상식적인 무속적 주술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기성측은 “앞으로는 나라와 민족이 사이비종교에 국정이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난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참회행동에 앞장서야 하겠다”고 마무리했다.
 

▲ 영애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행사장에 나타난 최태민 씨
 

다음은 기성측의 최태민 씨에 대한 보고서 전문이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출생과 사회활동

최태민은 1912년 5월 5일, ‘최도원’(崔道源)이란 아명으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 34번지에서 태어났다. (월남한 후 경남 양산군 웅상면 삼호리로 본적을 변경하였다.) 그의 부친 최윤성 씨는 독립운동가였는데 고향에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피신했고, 1920년에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990년에 그의 부친은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가정조선, 1990년 9월호)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알려진 것들은 그가 1927년 3월 황해도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던 것과 1942-45년 8월까지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경 고등과장인 서포의 추천에 의해 일본순사로 복무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후 월남하여 ‘최상훈’(崔尙勳)이란 이름으로 강원도경 경찰(45.9), 대전경찰서 경사(47.3)를 거쳐 인천경찰서에서 경위 직급으로 사찰주임(47.4)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1949년 6월 육군 제1사단 헌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군 생활에 몸담게 되었다. 또한, 1950년 7월에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그리고 해병대 비공식 문관을 지냈다. 1951년 3월, 6·25전쟁의 소용돌이 중에도 그는 ‘최봉수’(崔峰壽)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부산〉의 부사장을 지냈다(일설에 그는 부산에서 건국의숙 법과를 졸업했다고 주장한다).

1954년, 그가 42세 때 스무 살이나 더 많은 김제복 씨와 결혼했다가 그녀에게 여자문제로 고소당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인 ‘퇴운’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년이 지난 1955년 여자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전 부인 임성이 씨와 재결합했다. 1955년에는 경남 양산에서 운영이 어렵던 개운중학교(비인가)의 교장이 되었으나 2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에도 그는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1963년 5월에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또한, 1965년에는 천일창고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자 다시 도피하였다. 1969년 그는 도피 중에도 철저히 신분을 속이면서 ‘공해남’(孔亥南)이란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이후 계시를 받았다며 ‘방민’(房敏)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세교의 출발

1973년, 최태민은 ‘영세교’(靈世敎, 천부교에서 나온 조희성의 영생교와 다름)를 창설하고 스스로를 ‘원자경’이라 부르며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사이비종교 행각을 벌였다. 어느 때에는 “칙사” 혹은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 4면에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라는 내용의 8센티 광고를 실었다. 실제로 이날의 행사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각종 환자와 계룡산 주변의 신흥종교 교주들을 위시해 무속 잡인들이 수십 명 모여 있었다.”(현대종교, 1988년 6월호)

제목: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 /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이란 뜻)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 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든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하신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 일시: 5월 13일 오후4시, 장소: 대전시 대흥동 현대예식장 – 또한 모든 종교 지도자께서는 영세계 법칙을 전수받아 만인에게 참된 공헌을 하기를 바랍니다. / 난치병으로 고통 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극시 오시어 상담하시라. 칙사님의 임시숙소는 대전시 대사동 케이블카 200미터 지점 감나무집.

1973년 7월, 대전 시내에는 또 다른 영세교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그것은 최태민 자신을 조물주의 사자로 신격화하는 내용이었다.

제목은 “찾으시라!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주인국이 될 운세를 맞이했다는 칙사님의 권능과 실증의 말씀”이었다. 그 내용은 “한국은 현재 후진국인데, 조물주가 세계주인국으로 이미 정해 놓았다. 그 사명을 칙사님이 받아 이 땅 위에 오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세계종교사상 유래 없는 인파가 모인 서울 5.16광장에서 부흥사 빌리 그레엄 박사가 대한민국을 영적 종주국이라고 했다고 강조함).

1973년 7월, 전단에는 조물주의 성자와 선택된 인재를 찾아 모시고자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 자신이 찾는 사람들을 6부류로 제시하였다. 이 내용들을 살펴보면 최태민은 꿈을 이용하는 선무당의 행세를 한다고 볼 수 있다.

① 조물주의 역군으로서 인류를 위해 앞장서실 분, ② 태몽을 받고 출생하신 분, ③ 현몽을 받고 계시는 분, ④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계시는 분, ⑤ 신앙 없이 방황하는 분, ⑥ 신이 들렸거나 신이 쏠려있는 분

1973년 7월, 그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자 대전시 선화1동 동사무소 앞에 숙소를 정하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또한, 자신의 영특함은 둥근 원에서 시작된다고 밝히고, 숙소 벽면에 그려진 둥근 원을 똑바로 응시하면 영혼합일하여 만병통치와 도통하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최면술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영세교는 단순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영세교 교리는 『영세계의 칙사론』이란 책자에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 붙여놓고 ‘나무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 그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

1973년 11월, 그는 활동무대를 서대문구 대현동 대현빌딩 3층(16평)으로 옮겼고, 이화여대 앞에 ‘영세교’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74년 5월, 그의 신통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동대문구 박00 씨 집에 전세를 얻고 스스로 ‘태자마마’로 자칭했다. 다시 1974년 8월에 북아현동으로 본부를 옮겼는데 이때 추종자들은 300여명이었다.(동아일보 1990년) 그러나 일설에는 2,30명의 추종자들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규모가 작은 무속집단이었다고도 한다. 이때 그는 스스로를 ‘단군’ 혹은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 회사의 명칭을 합하면 ‘미륵’이 된다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음)

그런데,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22세의 박근혜는 “방바닥을 긁으며 얼마나 서러워했는지 손톱이 다 닳을 지경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내왔다. 1975년 2월, 최태민은 심적 혼란을 겪던 박근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그 편지에는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며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남)했던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현몽이나 접신은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정신적인 주종관계를 만들어 통제하려고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며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는 편지였다(김형욱 회고록).
 
1975년 3월 16일, 박근혜는 ‘육영수 현몽’ 이야기에 감동하여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하였다. 이때 최태민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심리적 혼란에 빠진 박근혜 앞에서 육영수 여사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되었다며 그녀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박근혜가 기절하고 입신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는 밀착되게 되었다. (후일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영적인 부부’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먼저 초청했던 목사, 스님, 신부들은 박근혜에게 듣기 좋은 말로 “육영수 여사가 천당에 갔다”는 말만 했지만, 최태민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3시간 넘게 박근혜를 설득하기를 “육영수 여사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권고하여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이때 그는 당시의 교계의 난맥상을 개탄하며 구국선교를 역설했다고 한다).

대한구국선교단 조직

1975년 4월 10일,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신학교육이나 목회의 경험이 전무했던 그가 생소한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의 조현종 목사라는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조 목사의 증언) 목사안수를 받았다. 며칠 만에 그는 전국적 조직인 ‘대한구국선교단’(76.12.10 구국봉사단, 79.5.1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창설했다. 이때부터 그는 ‘최태민’(崔太敏)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월간중앙, 1993년 11월호).

조현종 목사는 일본 법대를 나와 경찰서 간부를 지낸 사람이었고, 최태민과 경찰시절에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38년 피어선성경학교와 일본대학 법문부 종교과를 졸업하고 해방이 되자 경찰간부직을 거쳐 헌병소령으로 예편했다. 196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70년 종합총회 2대 총회장이 되었다(풀빛목회 1984년 7·8호).

최태민은 목사안수를 받은 후 서울 강남에 200평 크기의 ‘만남의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도 설립했다. 그의 딸 최순실은 근처의 압구정동에 몬테소리 유치원을 세워 운영하였다고 알려진다.

1975년 4월 29일,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아래 ‘대한구국선교단’ 총재가 되었다. 그는 1973년 5월에 한경직 목사가 주도하여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그레엄 목사를 초청한 전도집회와 한국교회를 부흥의 불길로 이끈 1974년 8월의 ‘엑스포74’가 성공적인 대형집회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기독교의 강력한 힘을 의식했던 것이다.

1975년 5월 13일, 그는 임진강에서 2,000명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였고, 그 자리에서 즉석 제안하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 일반 기도회가 아니라 ‘반공과 안보’를 전면에 내세운 궐기대회 성격이었다. 그때는 다수의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시점이었다. 이때 최태민은 박근혜로 하여금 심정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들었다.(월간조선)

1975년 6월 21일, 그는 배재고등학교에서 ‘대한구국십자군 창군식’을 거행하였다. 창설 취지문에는 ‘구국과 멸공’을 위한 구국십자군을 창설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때에 관내 기관장들과 공무원들이 총출동되었고, 기독교 목사들도 대거 참여하였는데 그들에게 멸공연수강좌를 하고 집총군사훈련까지 시켰다. (이때 종합총회 총회장 조현종 목사는 최태민을 교단 총회장을 시킨 후에 구국선교단의 소집 책임총재가 되었다, 전기영 목사의 증언)

1975년 7월 12일자와 12월 27일자 〈기독신보〉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감리회, 예장 통합총회 임원회가 ‘대한구국선교단’이나 ‘구국십자군’에 동조하거나 관여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런 일은 최태민이 주도한 대한구국선교단의 정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다(현대종교 1988년 6월호,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들을 고발하고 있다).

1976년에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개명하였다. 이때 총재인 최태민과 관련하여 각종 이권개입, 횡령, 사기, 융자알선 등의 권력형 비리와 여러 여성들과의 스캔들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때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태민에 대한 수사결과를 보고하였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을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최태민을 총재로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하여 구국선교를 빙자해 매사에 박근혜의 명의를 팔아서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금품 징수로 이권단체화하면서 치부한 자이다.

1977년 9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딸 박근혜와 최태민, 그리고 비리조사를 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한 자리에 불러 직접 친국(임금이 직접 중죄인의 죄를 따짐)을 하였다. 이때 박근혜는 눈물로 최태민을 옹호하였다. 당시 수사자료에는 비리혐의 44건에 3억 1,700만원, 여성 스캔들이 12건이나 보고되었다. (신동아, 2007년 6월호) 그런데 최태민은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 인터뷰를 통해 전면 부인했다.

현대종교연구소 탁명환 소장은 최태민이 “돈을 물 쓰듯 했으며...사무실에 앉아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쓰고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박근혜 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며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면 재벌들은 모두 죽는 시늉까지 했다”고 말했다. 최태민은 기업인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000-5,000만 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는 식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전국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총 300만 명의 단원을 확보했다.

1977년 9월 20일, 각종 비리와 스캔들에 대한 고발이 빗발치자 박정희 대통령은 특명을 내려 최태민을 구속하는 대신, “첫째로 최태민을 거세할 것, 둘째로 청와대 주변을 얼씬 거리지 말게 할 것, 셋째로 (구국여성봉사단만 남기고) 구국봉사단 관련단체는 모두 해체할 것”을 지시했다.(월간조선 2005년 11월호) 이때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최태민을 잠시 강원도에 보내어 자숙할 기회를 주었으나 오래 두지는 않았다.

1978년 2월 22일, 구국봉사단은 ‘사단법인 새마음봉사단’으로 개편되고, 박근혜가 총재로 취임하였다. 이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를 맡아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그런데, 1980년 11월에 ‘새마음봉사단’은 강제해산을 당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자 가장 먼저 박근혜를 찾은 사람이 최태민이라고 알려진다. 이때 박근혜는 부친의 측근들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1980년 1월, 항소심공판을 앞두고 김재규가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는 다음의 진술이 들어있었다(신동아, 2007년 6월호).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 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을 그 단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태민의 권력형 부정축재와 여성 스캔들에 대해 단호한 처벌을 하지 않고, 오히려 최태민을 두둔하고 박근혜 곁에 두었다 보고 10·26사건을 결행했다는 말이었다.

사회복지 재단을 통한 비리

최태민은 사회복지 재단을 통해 거금을 모았다고 알려진다. 첫째로 1980년 4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6개월이 지나, 29세의 박근혜가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는 1960년대 중반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비리 등에 연루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에 헌납하여 만들어진 학교였다.

이사장 박근혜는 1년 후 영남대학 재단 정관 제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에 대한 교수들의 반발로 박근혜는 4개월 만에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나 1988년까지 11월까지 이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때 박근혜의 측근 4인방이 실질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비리를 저질러 학교가 시끄러웠다. 학교소유 땅 매각대금 갈취, 불법자금 편취, 공금횡령, 부정입학, 판공비 사적 사용 등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 일가의 전횡이 벌어졌다. (조순제의 녹취록, JTBC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1월 6일 방송) 측근 4인방이란 최태민의 의붓아들인 조순제와 처남 손윤호, 외조카 곽완석, 그리고 박근혜 측근인 김정욱이었다.

일례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권을 잡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대대적인 사학비리 수사를 진행했다. 영남대학교의 전 총장 김기택 씨와 전 사무부처장 곽완석 씨 등을 조사한 후 영남대가 1987년에 8명, 1988년에 21명의 학생들에게서 총 4억 3,000만 원의 기부금을 받고 부정입학 시킨 사실을 밝혀냈다(동아일보 1988년 11월 3일자).

둘째로, 1983년 1월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딴 ‘육영재단’(어린이공원)을 설립하여 이사장이 되었고, 최태민과 최순실 그리고 사위 정윤회는 재단 일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1986년 최순실은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장이 되었고(미국 대학의 학·석·박사 학위는 가짜, 유아교육학과가 없다고 함), 모든 업무는 최태민이 사전 보고를 받는 등 전횡을 저질렀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 운영자금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및 기업의 출연금으로 조성되었다.

최태민은 어린이공원 내에 ‘근화교회’를 개척하고 내부 직원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진행했다고 알려진다. 1980년대 후반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으로 ‘근화봉사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1990년 8월, 박근령과 박지만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최면이라도 걸린 듯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최 씨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언니인 박근혜의 청원(최태민 씨를 옹호하는 부탁 말씀)을 단호히 거절해 주시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묘안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주셔야만 최 씨도 다스릴 수 있다고 사료되며, 우리 언니도 최 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진정으로 저희 언니는 최 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1990년 10월 23일, 어린이회관 정문 앞에서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의 분규가 발생하여 최태민 목사의 전횡이 드러나게 되었다. 11월 3일에는 박근혜가 동생 박근영(숭모회 측, 현재 통일교 신자)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물려주므로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박근영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줄 때까지 자신의 축재행위가 폭로될 것을 염려한 최태민이 박근혜를 방패막이로 삼는 행태가 계속되었다. 이때 박근혜는 사람들의 비난을 의식하여 “자신이 누구에게 조종된다고 말하는 것은 인격모독이다”라며 반박하였다.

1992년 11월 11일, 박근혜의 일기에서는 “각 시대마다 하늘이 성인을 통해 주어지는 계시가 있는데 그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예언이 있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므로 하늘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행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여기에서 하늘이 주어지는 계시가 있다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정신적 관계를 잘 말해준다.

최고의 지혜란 바로 바름이다. 이 지혜를 하늘은 각 시대를 통해 성인들을 통해 누누이 계시해 주셨는데도 잘난(?) 인간들은 그것을 귓등으로 듣고 무시하면서 오히려 그 바름의 반대편에서 또는 다른 데서 그 지혜와 평안을 찾으려 한다.

1993년 10월, 최태민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을 말하고, 귀신들린 이야기를 자주 하였으며, 특이한 방법으로 병고치고 점치는 일을 하는 등 주술행위를 함으로써 안수를 주었던 교단에서 쫓겨났다. (종합총회장 전기영 목사 증언) 이런 점에서도 목사로 호칭할 수 없다.

1994년 5월 1일, 82세의 최태민은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만성신부전증의 치료를 위해 장기 입원하였다가 서울 역삼동 자택에 돌아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는 부인이 6명이나 되었고 자식은 3남6녀를 두었다(월간조선, 2007년 7월호).

최태민에 대한 평가

2007년 7월 20일,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에 “카리스마 넘치는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있던 박근혜 후보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윌리엄 스탠턴 주한 미 부대사도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표현하였다(해킹 전문싸이트인 위키리크스).
 
2016년 10월 27일, 〈뉴욕타임즈〉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치유해 준다고 접근하여 황후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통제한 후 황제마저 장악하고 농단했던 시베리아의 ‘사이비 사제 라스푸틴’과 같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기사를 작성하였다.
 
결론적으로, 최면술사인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의 현몽을 미끼로 정신적으로 심약해진 영애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영혼과 몸을 지배하고, 그녀의 배후 지배자로서 각종 국가적 이권사업에 개입하는 비리와 성적 추문을 저질렀던 사이비 종교지도자로 위장한 인물이다.

현 시국에 대한 제언
 
첫째, 헌법에 따라 국민이 위임하여 한국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책임이 있는 박근혜 정부가 전통문화라는 미명아래 혹세무민하는 사이비종교 주술가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탐욕적인 인사들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국기문란 사태에 이르러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국민을 참담함 속에 빠트리게 된 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들의 배경에는 무속신앙에서 출발한 영세교 교주 최태민과 그를 비호하고 있는 사이비종교 권력이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에 떠오르는 샤머니즘 국가’라는 비웃음거리가 되는 심각한 국격의 추락을 가져온 이 현실을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각에 따른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이들은 전통문화라는 미명아래 비상식적이고 기복적인 미신행위에 빠져있다. 음양오행설이나 풍수지리설을 종교적 신념으로 받아들이므로 한국사회를 주술지배 사회(열등한 원시사회)로 빠트리고 말았다. 예를 들면, 오방낭은 동서남북에서 우주의 기운을 모아 담는다는 주술적 의미이고, 국가기관에서 문화행사라며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굿거리를 한다거나 국가안전처 장관 내정자로 47번 환생했다거나 죽은 전봉준을 만나고 내려왔다는 인물을 지명한다거나 최순실과 관련된 미르재단 문양이 사이비종교가 숭배하는 용이라거나 대통령이 입는 옷 색깔조차 사주와 궁합을 고려하여 정했다고 한다.

2. 이들은 사이비 종교행위를 앞세워 국가 지도자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현혹하였다. 죽은 자를 불러내어 접신하는 행위는 이단사이비 교주들이 자신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획득하고 상대방을 예속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모친을 잃은 영애 박근혜에게 ‘육영수 여사의 현몽’을 주장하며 접근하고 육 여사의 음성과 행동을 흉내 내므로 너무 놀라서 기절했다는 것은 최태민에게 완전하게 예속되었고 꼭두각시처럼 비리행위에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반증이다.

3. 이들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기업체를 협박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경쟁적으로 채웠다. 최태민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권력지향적 인사들은 기업체를 압박하여 기부찬조금을 거두고, 각종 국가 이권사업에 개입하고, 인사청탁을 제안하여 엄청난 재화를 부정 축재하는 비리를 저질렀다. 최태민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불법으로 물질뿐 아니라 성 거래를 하였다.

4. 신흥종교들처럼 전통 종교들의 특징들을 받아들인 종교혼합주의로 미혹하였다. 최태민은 불교의 깨침, 기독교의 성령체험(신내림), 천도교의 인내천(신인합일)를 활용하여 ‘영세계원리’라는 거짓된 주술행위로 미혹하였다. 자신의 영특함은 둥근 원에서 나오므로 이 원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주문을 외우면 치병이 되고 도통한다는 영세계원리라는 최면술 비법을 사용했다.

5. 자신의 탐욕을 성취하기 위해 기독교의 목사직을 이용하였다. 그는 신학교육이나 목회경험이 전무한데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라는 유령교단에서 며칠 만에 한 목사에게 뇌물을 주고 목사안수를 받아 지금껏 목사행세를 하였다.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한 뒤 총재가 되어 한국교회의 이름 있는 지도자들을 앞세우고, 뒤로는 기업체를 협박하여 기부금을 받아 부를 축적하였다.

6. 자신을 불교의 미륵으로 지칭하여 신격화하므로 혹세무민하였다. 그의 자녀들과 결탁세력들이 최태민의 별칭인 미륵(중생구제의 보살, 메시아)이란 이름을 기초하여 ‘미르’(용-무속종교의 상징)와 ‘K’를 활용한 재단법인들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들은 문화융성이나 스포츠홍보사업 등을 이유로 국가기관의 각종 프로젝트를 따 내어 거액의 재정지원을 받아내고 있다.

7. 그의 일족들은 현재 정통교회 신자로 등록하여 신앙생활하고 있다. 자신들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한 방법이거나 아니라면 말씀보다는 이적을 좇고 하나님 보다는 재물을 구하며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려는 세속적 가치를 숭배하는 기복적이고 물신숭배적인 왜곡된 기독교신앙에 젖어있는 신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다시 점검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태를 가져온 데에는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며, 이제부터 전국 교회와 지도자들은 만병통치나 만사형통을 앞세우는 비상식적인 무속적 주술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앞으로는 사이비종교에 국정이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난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참회행동에 앞장서야 하겠다.
 

기독교포털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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