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
소명 달라며 간구하는 내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의사인 남편이 덜컥 선교사 지망...훈련과 도전 넘어 베트남서 15년째 사역 중
이희정선교사(베트남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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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21 [07:2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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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정 선교사(베트남 롱안세계로병원)
큰비가 내리고 있다. 우기의 막바지에 들어서니 비는 더 세차게 내린다. 습기로 인해 집안 곳곳에 곰팡이도 피고 갈라진 벽 사이로 비가 스며들어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곧 건기가 시작되어 먼지가 많이 날리면 이 비가 그리워질 것이다. 우리네의 삶도 마찬가지다. 늘 더 좋은 것을 원해서 현재 주어지는 것에 감사할줄 모르다가 나중에야 지나간 시간 속에 우리들 삶을 채웠던 것들이 참 은혜이고 주님의 안배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베트남 땅에서 선교사의 삶을 산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되돌아 보면 순간마다 고비마다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부족한 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을 조금씩 더 알아가고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허락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96년 봄 어느날 느닷없이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5년 후, 내 나이 사십이 되면 선교사로 갈 것이다” 그러고는 선교 단체에 등록해서 선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당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가장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남편은 흉부외과 의사다. 대구 경북의대에서 흉부외과 전공의 과정을 보내는 동안은 시댁에서 살았다.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후 포항 성모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어 분가를 하였고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을 때였다. 특히 첫째 아들을 낳고 오년 만에 딸을 주셨기에 그야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근데 갑자기 남편이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선포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나에게 훈련을 같이 받고 준비해야 된다는 등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성실히 훈련을 받았다.

저는 사람이 내일 일도 모르는데 오년 후의 일로 벌써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저러다가 말겠지 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 사람은 사람의 내일 일을 모르지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모르실리 없음을 그 때는 깨닫지 못했다.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남편에게 변화가 생겼다. 아침 외래 진료가 끝나면 병동으로 올라가 환우 분들께 복음을 전하고, 점심시간이면 병원 로비에 상담 코너를 열어놓고 상담 후에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동료 의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목사님을 모시고 성경공부도 하고,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공휴일이면 의료봉사팀을 조직해 농,어촌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하러 나갔다. 무엇보다도 기쁨과 설렘으로 주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주 동안 전도한 사람들 중에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기대하며 작은 선물을 들고 교회 마당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셨는지 실제로 전도지를 들고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 훈련이 무엇이길래 이런 변화가 오는지 나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찔림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모태 신앙인 내 심령에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이 시작된 것이다.

1997년 남편은 1년간 선교훈련을 마친 후 의료 선교사로 훈련하는 곳이 있는지를 기도하며 찾기 시작했다. 그 때 찾아간 곳이 부산 의료 선교 교육 훈련원이다. 이 때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선교 훈련을 받았다. 나는 부산까지 같이 가서 부산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다가 훈련을 마치고 온 남편과 포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선교에 대해서 남은 하여도 나는 못하는, 아니 안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편이 선교훈련원 1년 과정 중 6 개월을 마치는 이수식 날, 나는 의료선교 훈련원으로 초대를 받았다. 훈련원 리더십들이 나를 두고 중보기도를 많이 해왔음을 알게 되었고, 그 날 나는 전격적으로 선교 훈련을 같이 받기로 결정을 했다.

이렇게 남편과 같이 선교 훈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적으로 평안하던 가정에 도전이 찾아 왔다. 1997년 IMF 파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 동안 남편의 병원에서 전도 활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차에, IMF로 인해 병원의 사정이 어려워졌다며 구조조정을 하면서 병원으로부터 권고사직을 통보 받았다. 그리고 남편의 어릴적 친구에게 돈도 빌려주고 대출 보증도 섰는데 그 친구가 어려워져서 대출금이 밀리자 남편의 월급을 차압하겠다는 통지를 받았다.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라 쉽게 직장도 구해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이 시험(Test)을 잘 지나가거라” 아! 올게 왔구나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아니면 그렇게 열심히 선교를 준비 해온 남편에게 권고 사직이라는 불명예를 주시냐고 말렸다. 나는 감사의 무릎을 꿇고 우리 가정을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기도를 드렸다. 포항 성모 병원의 퇴직금으로 그 대출금을 대신 갚고 그 친구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포항을 떠나 고신 복음대학병원의 김해 복음병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김해 중앙교회에 등록하였다. 나중에 김해 중앙교회는 우리를 파송한 교회가 되었고, 지금까지 베트남에서의 선교사역을 감당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참 놀라운 하나님의 경영이다. 우리 부부는 김해 중앙교회에 등록한 날로부터 이 곳이 선교지라 생각하고 할 수 있는대로 힘써 전도하자고 다짐했다. 남편은 대학부 저는 초등부 교사를 했다. 또 나에게는 전도에 열심인 지체들을 붙여주셔서 김해 복음 병원내 도서전도, 방과 후 학교 전도, 연세 많으신 전도사님을 운전해 드리며 새 신자를 같이 심방했다. 토요일이면 부산의료선교 교육 훈련원에 가서 열심으로 훈련받고 간사로 섬겼다.

하지만 이런 과정 중에서도 나는 여전히 주저함이 있었다. 선교는 지,정,의 즉 머리로 말씀에 근거해서 왜 선교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정서적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의지를 갖고 행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막상 짐을 꾸려 떠나는 마지막 단계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소명이 없었고 열심히 훈련했어도 소명을두고 절실히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이 많아 발을 헛디뎠는지, 귀에 기타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칼로 절단하듯 아킬레스 힘줄이 끊어졌다면서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다시 뛰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수술을 받고 병실로 올라왔는데 너무 비참한 마음이 되었다. 지난 시험(Test)때도 잘 지나왔는데 막상 걸을 수없는 상황이 되니 하나님께 원망이 생기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병실에서 나는 주님 앞에 결단의 시간을가졌다. “ 하나님 제게 소명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셔야지 저는 흔들리지 않고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주저하고 있는 제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저를 보내시려거든 말씀하여 주십시오”라고 눈물과 애가 끓는 기도를 드렸는데 심방 오신 목사님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디모데 후서 4:9-10)".

누가는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이 천둥처럼 귀를 때리고 마음을 쳤다. 그렇다! 훗날 주님 앞에 섰을때 나는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였다. 그 날 나는 하나님 앞에 부족한 자이지만 주께서 부르시니 기꺼이 선교사로 순례자의 삶을 살겠다고 약속 드렸다. 마지막 순간에 주께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디모데,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는 누가, 주의 일에 유익한 마가가 되겠다고 약속 드렸다. 이 소명의 말씀은 베트남 땅에서 외롭고 힘들 때 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되었다. 세상의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천지가 변하여도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되었다.

선교지로 나갈 때 아들은 초등 6 학년 딸은 초등학교를 입학할 나이였다. 딸은 어려서 부모와 함께 가니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에 비해 아들은 힘들어 했다. 토요일마다 훈련원을 함께 다녔고 한국에서도 공휴일이면 시골로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왜 굳이 베트남까지 가야 하는지 수긍하지 못했다. 가족,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고 앞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할 거라는 상황에 대해서도 인정이 되지않는 것 같았다. 기도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성령께서 아들의 심령을 만져주셔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직전 2001 년 구정에 라오스로 마지막 단기의료 선교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아들을 위하여 팀원들에게 성령님의 일하심을 간절히 부탁했다. 베트남으로 곧 떠나야 하기에 나의 마음이 급했다. 단기 의료선교 현장에서 아이들은 하루에 천명 이상 몰려드는 환자들을 줄 세우는 역할을 감당한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 라오스 아기가 진찰하는 선생님 앞에 왔을 때는 이미 숨이 멈춘 상태였다. 아버지가 심폐소생술을 하고 인공 호흡을 하고 기도 가운데 아이가 살아 났다. 이튿날 어제의 상황이 또 벌어질까 주의했는데 똑같은 상황이 또 벌어졌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이는 살아나지 않았다. 이 라오스 아기는 패혈증으로 멀리서 소문을 듣고 바나나 잎을 그늘 삼아 사흘을 걸어 온 것 이었다. 아기의 엄마가 통곡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10 분만 일찍 왔어도” 하면서 우는 모습을 아들이 보았다.

그 때 아들은 선교사로 가야 하는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들은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이 한국까지 올 수 없기에 그들 가까이로 우리가 가는 것이 옳다고 받아들였다. 성령님께서 일하여 주셨다. 그 이후 아들은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었고 지금은 서울대학원 의과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지나와 생각해보니 정말 남편이 선언했던 5년의 시간이 지나고 2001 년 2 월 마흔의 나이에 우리 가정은 이렇게 길을 떠났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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