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지도자 회개가 성령역사 불렀다”

크리스찬투데이 | 입력 : 2007/01/10 [16:27]

▲평양 장대현교회 모습.     ©
<글 싣는 순서>

1. 평양 대부흥운동의 역사
2. 올해 100주년 기념행사는
3. 대부흥운동 의미와 방향
4. 2007 한인교회 선교비전

 

놀라운 성령역사로 한국 교회사의 큰 획을 그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서 시작해 한반도 전지역을 회개와 기도∙성령체험∙영적대각성의 물결로 뒤덮었던 이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기적적인 대부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침체된 한국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 평양 대부흥운동의 역사와 기념행사, 부흥운동의 의미와 방향 등을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1907년 1월14일 오후7시 평양 장대현교회.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안수를 앞두고 있던 길선주 장로는 평안도 전역에서 몰려온 신자 1500여명 앞에 섰다. 그리고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임종을 앞둔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 난 그 부인 재산을 관리하던 중 욕심에 겨워 부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 장로가 보여준 통한의 회개는 그 자리에 있던 신자들과 외국인 선교사 모두를 울렸다. 이때부터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선교사와 교인들이 앞다퉈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통성기도를 올렸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교만과 편견을 회개했고, 교인들은 선교사에 대한 미움과 질시를 뉘우쳤다. 회개는 또 다른 회개를 낳았으며, 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됐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했던 정익로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날 밤 길선주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찼으며 순결과 성결로 불붙었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길선주 장로의 회개가 시발점

부흥운동이 실질적으로 처음 목도되기 시작된 것은 1903년이었다. 동해안 원산에서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 등이 연합모임을 갖고 성경을 가르치며 진행한 작은 기도회에서부터 먼저 기도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하였다. 오로지 한반도 복음화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기도한 것이 촉매제가 되어 1904년 한 해 동안에 1만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렇게 번져간 기도의 열기가 1907년 평양에서 천지를 흔드는 영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키게된 것이다. 이같이 4년 동안 계속된 공동체 기도운동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이 또한 민족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었다. 1904년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으로 인한 국권의 상실,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침략 야욕은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블레어(William N. Blair)가 <골드 인 코리아>(Gold in Korea)에서 지적한 것처럼,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이며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기관이기를 원했다. ”일련의 정치적 위기로 민족의 소망이 기독교에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데다 인도와 웨일즈에서 발흥한 부흥운동의 소식은 한국교회에 부흥에 대한 소망을 한층 더해 준 것이다.

1903년 원산 기도운동이 원동력

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가 열렸다. 이 사경회에 여자들은 장소가 협소했기 때문에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북교회와 산정현교회∙남문밖 교회나 서문밖에 있는 남자들의 사랑채에 모여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선교사들의 아내들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여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다.

사경회는 새벽기도와 오전 성경공부, 기도회, 오후 전도, 저녁집회 등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때의 모습으로 한 선교사는“어둠의 세력들이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천장은 놋으로 덮인 듯 기도는 상달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14일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가지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했다. 이대로 사경회가 끝난다면 그토록 사모했던 영적부흥운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4일 저녁집회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윌리엄 헌트 선교사가 메시지를 전하고 이길함(그래함 리) 선교사가 나와 부흥을 사모하는 교인들의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그리고 길선주 장로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경회가 끝날 무렵 진행자는 혹시 다음날 아침까지 남아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500명-600명이 죄를 고백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길함 선교사는 이날 밤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기도 후 누군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들 모두에게 임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죄를 고백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죄를 고백한 뒤 바닥에 꿇어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팔꿈치로 마루바닥을 치며, 자신의 죄에 대해 심한 고뇌에 빠졌으며, 곳곳에서 ‘나를 도와주소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하는 외침들이 그치지 않았지요. 특히 우리들 가운데 강씨로 알려진 한 교인은 오랫동안 적의를 품어왔던 김씨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는데 그렇게 교만하고 덩치 큰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다가 쓰러지고 통곡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설명해준 대표적인 사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날 밤의 죄 고백과 회개의 통곡소리는 새벽2시가 되어서야 다음 날 저녁에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한 뒤 마쳤다. 길선주 목사가 설교를 한 다음 날 저녁집회 역시 그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집회 후 600여명이 다시 남았는데 전날보다 더욱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조지 매큔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존경하는 브라운 박사님,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죄 고백과 회개의 통곡 이어져

장대현교회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당시 최대 감리교회였던 남산현교회를 비롯 평양의 모든 교회와 평양연합대학, 평양신학교, 평양여자초등학교, 평양여자고등학교 등 모든 미션스쿨로 번져나갔다. 평양시내는 그야말로 눈물바다. 교회와 미션스쿨에선 매일 자신의 죄를 토설하며 울부짖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평양에 모여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리바이벌’(Rivival) 곧 부흥이라 명명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아주 특별하고도 완전한 간섭”이란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부흥회 전엔 남녀와 반상이 예배당 안에서도 따로 앉았는데, 점차 형제의 사랑을 느끼고 차별없이 한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부도덕한 삶과 축첩제도, 문맹과 미신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 계기가 됐다. 백범 김구 선생은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는 말로 당시 한국교회의 역할을 평가했다.

불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단들도 서로의 벽을 허물고 연합하여 복음을 전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연합공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조선예수교교회’라는 이름까지 지었다. 이 열기가 경기도, 충청도 등 전국으로 번지면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인이 크게 늘어났다. 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당시 20만명에 지나지 않았던 교인수가 100만명에 이르렀다. 이 부흥운동은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으며 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으로 놀랍게 번져 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대부흥 이후 교파와 교단, 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금연∙금주, 우상숭배 퇴치, 여권신장, 기독교학교설립 촉진, 윤리의식 증진, 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 대부흥 때문이었다.                                                                                                   우형건 기자 hgwoo@christiantoday.us

  • 도배방지 이미지

  • davidchun 2007/02/02 [17:25] 수정 | 삭제
  • 목사회회장자리를 중재한다고 ㅈ 목사유혹에넘어가 목사회장자리를찬탈한 한목사님을 평양 장대현 교회로 보내주셨으면 세탁해서......
인터뷰 / God with us
이동
메인사진
폴 아트 리 화백 개인전 10월 26일-11월 16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