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거장
(50) 토마스 머톤 (1915-1968년)
“세상변화 위한 영성”
조대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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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8/12 [07:4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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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들을 준비하면 일상에서 명상 가능
 
마스 머톤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20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수도사이다. 프로테스탄트교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비기독교인들도 종종 머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머톤은 20세기 미국 신자들의 영성에 최고의 영향을 준 인물이고, 그의 영향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흘러 나갔다. 머톤이 현대 신자들에게 끼친 최고의 영향은 그는 평범한 신자들도 명상(contemplation)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머톤은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세상을 도피하지 않고 20세기 현대인들이 당면한 사회 문제들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말하였다.

머톤은 프랑스에서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학교에서는 뛰어났으나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하였다. 머톤의 어머니는 그가 6세때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화가인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해야했으며, 그림을 그리는데 빠져버린 아버지는 어린 머톤을 혼자 남겨두고 작업에 열중하곤 하였다. 그나마 아버지도 머톤이 16세때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머톤은 한때는 미국에 있는 외할머니집에서 살기도 하였다.

지식을 탐구하는데는 고래의 식성과 같은 능력을 가졌던 머톤은 캠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콜럼비아대학으로 옮겨 학부과정을 마쳤다. 계속하여 콜럼비아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성보나벤투러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23세에 카톨릭교의 교인이 되었고, 26세에는 켄터키주의 겟세마네에 있는 트래피스트수도회에 입문하였다.(트래피스트수도회는 개혁파 시스터시안수도회이다.)

모든 것을글로 표현하는데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던머톤은 고독과 무미건조한 수도사와 은자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갈망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1948년에 출간한‘7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은 인터내셔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1968년 태국의 방콕에서 열렸던 카톨릭교와 불교의 이교도간의 화합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였다가 감전사로 세상을 떠났다. 머톤은 여러 장르의 글을 썼는데 이중에는 개인저날, 경건서적, 명상록, 신학논문, 동양의 종교에 관한 연구, 시, 세속학문에 대한 논문과 비평들이 들어있다. 머톤은 20세기 카톨릭교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프로테스탄트교 신자들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유명하게 알려지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인물이다.

 
고요 속에서 하나님 만날 수 있어
 
머톤은 영성가이고 영성신학자이나 엄격한의미에서 신비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체험했다고 고백한 적이 없다. 머톤의 가르침을 두가지로 종합해 볼수 있다. 첫째, 인간은 고요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즉,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있다는 것이다. 부와 영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바쁘게 쫓기면서 사는 물질 위주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면서 고요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명상가(명상하는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는"고 그는 말한다. 둘째, 머톤은 모든 신자안에 명상의 씨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명상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명상의 씨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머톤은 모든 신자는 명상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을 실질적으로 효력화하기 위한 것이 명상을 하는 목적이라고 머톤은 가르친다.

 
그리스도 삶 본받아야
 
그러면 명상은 무엇인가? 머톤은 명상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명상은 본질적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고요속에서 듣는 것이다. 우리는 듣는 것을 정지할 때에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 고요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이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머톤의 역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말하여 명상가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머톤은 명상이 신자의 삶의 한부분이고 행위인 것을 부인한다. 그에게는삶 자체가 명상이여야 한다. 명상이 신자의삶의 모든 부분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머톤은 수도사의 삶을 살았지마는 세상을 도피하여 암자에 앉아서 명상만 하는 은자의 삶을 거부한다. 참 명상가는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명상가는 사회의 불의와 부정과 인종차별같은 문제에 대하여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상가는 고요한 중에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다. 머톤은 수도사의 삶을 살지 않는 보통 신자들도 일상 생활를 하면서 명상의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머톤은 명상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명상가는 자신의 명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꺼려한다.

명상가는 명상에 대하여 말하기 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한다. 이 것이 머톤이 평생동안 하고자 하였던 일이었다. 우리는 머톤의 영성에서 두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고요를 즐기는 것을 배워야한다. 고요는 외로움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군중속에 있으면서도 외롭다. 세인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사는 유명인들 중에도 외로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현대인들이 자신의 귀를 세상소리와 인간소리로 채우는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오늘부터라도 우리는 시간을 정해놓고 고요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습관을 길러야한다. 둘째, 머톤의 영성은 보통 신자들로부터 튀어나지 않는 영성이다. 다시 말해서 머톤의 영성은 우리를 이끄는 영성이지 우리를 내려다보는 영성은 아니다. 머톤은 사람을 좋아하였고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다. 머톤은 독거하며 깊은 명상을 하는 수도사의 삶을 살았지만, 우리에게 머톤은 특별하고 멀리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머톤에게서 조금의 영적 나르시시즘도 찾아볼 수 없다. 머톤은 세상의 눈으로부터 자유하였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하였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시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조금 신비한 체험을 하며는 영적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는 이런 체험를 사모하며 영적 열등의식에 빠지는 기형아적인 영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머톤에게서 영적 나르시시즘이나 영적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나로부터 자유하여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영성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영적 거장의 영성에 대하여 배우면서-또한 오늘 머톤의 영성에서도 보았듯이-영성은 교리나 교파나 종교의 가르는 선을 희미하는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일부 보수주의(개혁주의를 포함)자들은 영성이란 말이나 영성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서 영성운동의 파도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보수주의는 20세기초에 오순절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나중에 오순절 운동의 파도에 묻혀 버렸듯이 21세기초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영성운동에 대하여 바른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다. 밀려 들어오는 산같은 물결에 묻혀버리지 않고 이 물결을 어떻게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해 낼 것인가 하는것이 21세기의 보수주의가 풀어야 할 당면한 과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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