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거장
(34) 십자가 요한 (1542-1591년)
“영성신학 기틀 형성”
조대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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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4/07 [01:4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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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 기틀 형성”

‘어두운 밤’개념도입…신비체험 분석∙체계화
정화되지 않은 영혼에게 빛은 어두움으로 출현

 
 
자가 요한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신비주의자이다. 십자가 요한(요한)은 영성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에서 요한의 영성신학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의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가르침은 "어두운 밤"(dark night)이다. 요한의 어두운 밤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영성신학의 신비로운 체험을 분석하여 체계화하였고 이런 체계적인 가르침은 후세에 일어날 영성신학의 틀을 잡아놓았다. 그러므로 현대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체험과 가르침도 요한이 세운영성신학으로 분석되고 평가된다. 카톨릭교회는 요한이 영성신학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1926년 교황 파이어스 9세가 요한을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요한은 스페인의 폰티베로스라는 조그만 지방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또한 그의 아버지가 요한이 2세때 세상을 떠나면서 요한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다. 요한은 20세에 카멜리트 수도회에 입문하여 수도사의 삶을 살았으며 1567년에는 살라만카 대학에서 신학수업을 마치고 신부로서 안수를 받았다. 그후에 요한은 카말리트 수도회를 개혁하는 사역에 참여하게 되면서 아빌라 테레사를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 테레사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녀와 영적인 교류를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요한은 테레사와 함께 디스칼시드(Discalced, 맨발의) 카멜리트 수도회의 창시자로도 알려졌다.

요한은 카멜리트 수도회의 개혁에 참여하게 되면서 반개혁파에 의해 납치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요한은 옥중에서 저서를 쓰기도 하였고, 옥에서 풀려난 후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살면서 영성신학의 대작들을 집필하였다. 요한의 대표작으로는 갈멜산으로의 상승-어두운 밤 (The Ascent of Mount Carmel-The Dark Night)이 있는데 이것은 영성신학에 관심있는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야하는 역작이다. 요한은 기독교의 최고의 영성신학자 중의 하나이지만 그는 여러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성신학은 닛사 그레고리, 어거스틴, 베르나르드, 루이스브로익과 토마스 아켐피스의 영향을 받았다. 조직신학적으로 요한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체계를 따랐고, 또한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하였다. 요한은 "우리가 성경을 우리를 인도하는 지침서로 받아들이는한 우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요한의 영성신학에 대한 공헌은 지금까지 가르쳐 내려온 전통적인 정결, 조명, 연합의 삼단계의 신비한 체험을 세부적으로 파헤치어 분석한 것이다. 특별히 그는 "어두운 밤"의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설명한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성의 초보 상태에서 장성한 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어두운 밤"(dark night)을 거치게 한다고 말한다.
 
감각과 영혼의 어두운 밤
 
어두운 밤은 두종류의 밤이 있다. 하나는 " 감각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senses) 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pirit)이다. 먼저 인간은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여정에 들어간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인간의 감각이 정화되고 정결하게 되면서 영성화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감각을 초월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감각은 메마르고 무디어지는 상태에 들어간다. 요한은 여기서 감각의 어두운 밤과 죄와 육신의 약함과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감각의 메마름과 무디어지는 것과는 구별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은 참 감각의 어두운 밤을 구별할 수 있는 세가지 표적을 가르친다.

첫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과 위로를 얻을수 없는 것과 같이 영혼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과 위로를 얻지 못한다. 어두운 밤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의 욕구을 정화하고 정결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기쁨이나 달콤함을 얻을 수 없다.

둘째,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인간의 기억력은 간절하고 세밀하게 하나님을 향하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것들에 대한 무딘맛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이것은 인간이 감각의 어두운 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미지근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각의 메마름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과 능력을 감각에서 영혼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이 영의 세계의 선한 것을 감각할 수 없기 때문에 감각은 메마르고 공허하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은 아무것도 맛보지 못한다. 영혼의 영성감각도 아직 정화와 정결의 상태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은 여기서 메마름과 무디어진 것을 체험하게 된다.

 
셋째,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명상하고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에 빠진다.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일상시에 행했던것과 같이 명상하고 기도하고 상상할 수 없다. 감각의 어두운 밤에서는 하나님은 인간과 더 이상 추론적인 분석이나 종합적인 아이디어로 대화를 하지않고 단순한 명상으로 정결한 영혼을 통하여 대화한다.

이런 단순한 명상은 생각할 때 일어나는 추론적인 순서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각의 어두운 밤을 통하여 완전히 다른 차원의 명상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다음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혼의 어두운 밤은 감각의 정화와 정결을 완성한다.
둘째, 영혼의 어두운 밤은 인간의 삶의 의식, 초의식, 무의식의 모든 것을 정화하고 정결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전인간적으로 사랑에게 순종하게 만든다.
셋째, 영혼의 어두운 밤은 인간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을 크게 만든다.

요한은 이런 체험은 영혼에게 어두울뿐만 아니라 고통과 고뇌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의 신성한 지혜의 높이는 영혼이 받아들일수 있는 수용 능력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비밀이 더 명백하고 분명할수록 영혼에게는 이것이 더 어둡고 숨겨진 것으로 보여진다고 요한은 말한다. 빛이 더 강할수록 올빼미의 눈에는 더 캄감하게 보이고, 태양이 더 강하게 비칠수록 눈은 더 시력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다. 이같은 원리로 신성한 빛이 영혼을 치며는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영혼에게는 어두움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것을 어두움의 광선이라고 부른다. 요한이 이런 체험을 어두운 밤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이유는 영혼의 저속함과 불결함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혼은 어두운 밤에서 고통과 고뇌를 체험하게 된다. 영혼은 이런 신성한 은혜를 감당하기에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으로 너무나 약하다. 신성한 명상은 영혼을 어느정도 강압적으로 제압하여 강하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영혼은 거의 죽은것과 같이 된다.

 
특별히 신성한 빛이 강할때에는 영혼은 죽음에 들어간 것과 같이 된다. 이 어두운 밤에서는 감각과 영혼은 무겁고 어두운 짐을 지고 너무나도 심한 고통과 고난을 거치기 때문에 영혼은 차라리 죽음이 위안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두운 밤을 거친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정혼과 결혼에 들어가게 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기독교 역사상 요한처럼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분석하여 가르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한이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신비주의자라는 것에 의문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요한은 현대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이상(비젼)을 보는 것이나,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나, 영적 투시력을 갖는 체험은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말한다. 요한은 오히려 이런 것들은 장성한 영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같은 초보적인 영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영성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그는 삶에서 체험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삶은 고통의 삶이었지만 그의 말과 행위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충만하였다. 요한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었다.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한의 십자가가 된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 역사상에 최고의 신비주의자의 이름 앞에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현대신자들에게는 아이러니칼하게 들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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