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거장
(31) 존 칼빈 (1509-1564년)
조대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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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10 [02:5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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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영적 결혼∙충만한 상태”
 
칼빈, 현대 신자중에 존 칼빈(칼빈)을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이다. 칼빈처럼 현대 신자들로부터 극적으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신자들은 칼빈을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어떤 신자들은 지옥의 교리인 예정론을 만들어내어서 교회를 망쳐버린 자라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칼빈은 현대인의 삶과 사상을 바뀌어 놓은 위대한 신학자(preeminent theologian)이며 사상가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면 과연 칼빈을 영성가나 영성신학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칼빈은 먼지처럼 메마르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는 "나는 지난 16년 동안 칼빈과 동역을 하면서 그에게서 크리스천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보았다. 이런 삶은 사람들이 비방은 쉽게 할 수는 있지만 따라 살기는 힘든 삶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 위한 신앙지침서 저술

칼빈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노용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부가 되기 위하여 파리대학에 가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공부도중에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어 칼빈은 올리언스대학과 부르기스대학에 옮겨져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면서 고전문학, 그리스어, 히브리어,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파리대학으로 다시 와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칼빈은 파리대학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중의 한사람으로 수사 대상이 되자 파리에서 피신하여 나왔다. 그는 프랑스와 이태리와 스위스를 떠 돌아다니다가 스위스의 바젤에 정착하였다. 칼빈은 여기에서 1536년에 프로테스탄트교 신자들을 위한 신앙 지침서를 저술하였다.
 
이것이 후세에 기독교강요로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은 특별히 프랑스에 있는 프로테스탄트교 신자들을 위하여 쓰여졌는데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왕프란시스 1세 앞에서 프로테스탄트교 신자들을 변증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기독교강요와 함께 "칼빈"이라는 이름이 온 유럽에 알져지게 되면서 칼빈은 더욱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칼빈은 은밀하게 프랑스에 들어가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스위스의 스트라스부르그에 가는 길에 제네바에 들리게 되었다.

제네바에는 파렐(William Farel)이 프로테스탄트교 지도자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칼빈이라는 청년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칼빈에게 동역을 하자고 간청을 하였다. 칼빈은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은 조용한 학자의 삶을 살려고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간청을 하여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칼빈을 보고서 파렐은 "당신의 조용한 학자의 삶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기를바란다"는 말을 내뱉고 나갔다. 파렐의 이 말이 칼빈의 가슴을 찔렀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찾았으며, 하나님의 뜻이 제네바에 남아서 주의 사역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후세에 알려진 종교개혁가 칼빈의 삶이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의 사역은 쉽지 않았다. 제네바는 카톨릭교회의 멍에를 벗어 던졌지만 아직까지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무질서로 가득차 있었다. 1538년 칼빈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신자들에게 성찬을 주는 것을 거부하자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과 파렐을 제네바에서 쫓아내었다. 순례자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옮겨서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제네바에서 쫓겨난 삶이지만 스트라스부르그의 삶은 칼빈에게 평안한 삶이었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강요를 수정하고, 성경 주석을 저술하고, 프랑스 난민들을 위한 조그만 교회의 목회를 하면서 평안을 찾을수가 있었다. 칼빈은 1540년에는 결혼도 하였다. 그가 결혼한 여자는 두 자녀를 둔 과부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삶의 안정을 찾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청빙서가 왔다. 칼빈은 이 편지를 받고 마음에 고심을 하였다. 그는 제네바에 돌아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교를 위하여 제네바로 돌아왔다. 1541년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38년 교회에서 쫓겨날 때 설교하였던 다음 성경 구절들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절들의 의미를해석하는 강해설교를 하였다. 칼빈에게 설교는 항상 말씀의 의미를 밝혀주는 강해설교이었다.

그는 제네바에 돌아와서 목회를 하며, 신학책과 성경 주석을 저술하며, 신학생들을 가르치며, 유럽의 종교개혁가들에게 자문을 주며 온 유럽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혼신을 바쳤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병든 몸을 이끌고 하였다. 그는 열병, 담석, 통풍, 치질, 폐병, 위궤양, 장염, 편두퉁등 열가지 넘는 병을 앓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불렀다. 칼빈은 하루에도 여러번 설교를 하였는데 그가 서 있지 못 할때는 앉아서 설교를 하고, 설교가 끝나면 교인들이 그를 의자에 앉은체로 다음 설교할 장소로 옮겼다. 칼빈에게 항상 위로와 힘이 되었던 아내는 1549년 세상을 떠났다. 자녀가 없었던 칼빈은 그후 독신으로 삶을 살았다. 칼빈은 1564년 "나를 공동묘지에 묻고 묘지를 붙이지말라"는 말을 남기고 이 땅의 순례자의 삶을 마쳤다.

 
영성없는 신학은 필요가치 없어

칼빈은 신학과 영성을 하나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에게 영성이 없는 신학은 필요없는 신학이었다. 우리에게 기독교강요는 조직신학책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칼빈은 이것을 신자들을 위한 신앙의 지침서로 저술하였다. 칼빈이 가르친 독특하고 대표적인 교리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다. 칼빈이 가르친 신비적 연합은 말 그대로 신비하고 영성이 충만한 교리이다. 문제는 많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이것을 지적인 차원에서 이론적으로 해석하여 칼빈을 영성이 결여된 메마른 사람으로 만드는데 있다. 칼빈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혼으로 표현한다. 마치신랑과 신부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처럼 신자와 그리스도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삶이 신자에게 전해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신은 신자의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져다 준다. 이런 체험적인 지식을 받을 수 있는 때가 성찬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칼빈에게 매우 중요하고, 성찬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다.

칼빈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인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계신 천상으로 올라가 신자와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적이며 실질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찬은 신자가 천상에 오르는 사다리와 같다는 것이다. 칼빈은 또한 기도는 영성(piety, pietas, 경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친다. 그는 신자가 기도에 실패하면 신앙생활에 실패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신자가 기도를 해야 하는 네가지 이유를 가르친다.
첫째, 신자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섬기기위한 열정으로 불타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둘째,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잘못된 욕망이나 소원이 일어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의 복을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넷째, 신자는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또한 무언의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신자가 조용해 질수록 그는 기도할 때 말이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어떤 때는 최고의 기도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칼빈은 중세기까지 수도사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신비한 영성을 모든 신자들이 갖는 영성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의 교리를 통하여 이루었다.프로테스탄트교의 신자들이 누릴수 있는 신비한 영성이 이 교리에 담겨있다. 이 영성을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찬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쯔윙글리의 기념설을 무너뜨리고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한 영성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영성의 삶을 시작해야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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