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문화로 성경 읽기(49)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서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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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01 [23:37]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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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을 다 수확하고 난 뒤의 황량해 보이는 저 빈들도, 푸른초장이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열립니다. 그야말로 처음 겪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겪은, 겪고 있는 그리고 또 새롭게 맞이할 하루하루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자리하는 듯합니다. 무슨 말로 서로 주고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성경의 무대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지역도 모두 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지나면서, 그리고 지나고 나서도 새로운 꿈을 꾸고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겨울 우기입니다. 이 계절이 끝나면 봄이 차오를 것입니다. 거칠고 메마른 것으로만 보이는 누런빛의 들판은 다시금 온갖 푸름으로 가득 차오를 것입니다. 눈비와 비, 풍성한 이슬이 모이고 흘러서 시내가 흐르고 꽃길이 열릴 것입니다. 시내가 흐르는 그 물길 주변 자리에는 푸르른 풀이 덮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빨간 꽃, 파란 꽃, 노란 꽃 온갖 색으로 옷입은 꽃들이 차오를 것입니다. 그 봄이, 그 차오름이 그립습니다. 기다려집니다. 그래서 읽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2).

 

▲ 봄을 맞이하면서 돋는 푸른 풀이 덮이는 들판도, 푸른초장이다.

 

성경 속으로

 

성경의 땅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푸른 초장을 가진 광야는 드물기만 합니다. 예루살렘 북쪽 사마리아 산지나 갈릴리 지방은 물론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 산지는 예외입니다. 유대 산지의 벧세메스 지역이나 족장길을 따라 이어지는 사마리아 산지와 바산 산지 등은 사시사철 푸르른 초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양떼가 아닌 소를 목축하기에 적절한 환경일 뿐입니다. 양떼와 목자의 삶의 자리인 푸른 초장은 푸르른 초원 지대, 산지가 아닙니다. 겉보기에 메마르게만 보이는 그런 광야가 목축의 무대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푸른 초장이 바로 이런 들판입니다. 봄철이 되어야만 잠시동안 푸른 풀과 들꽃이 덮이는 들판입니다. 

 

푸른초장은 드넓은 평평한 푸른 풀밭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봄과 여름에 곡식을 베고 난 뒤의 들녘도 푸른 초장입니다. 가파른 산골짜기 비탈길도 푸른 초장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보기에 먹음직해 보이지 않는 마른 풀이나 가시덤불이 있어도 그곳이 푸른 초장입니다. 이 푸른 초장은 양의 눈에 보이는 푸른 초장이 아닙니다. 목자의 눈에 양떼를 쉬게하는 푸른 초장입니다. 푸른 초장은,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곳, 양떼들이 활동할 수 있다고 양떼를 풀어놓는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적절한 먹거리가 있고, 목자의 눈에 위험으로부터 차단된 채 양떼가 노닐 수 있는 공간입니다. 

 

▲ 성경 속 들판, 광야에서 물은 그 자체로 귀하다.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도 쉴만한 물가이다. 

 

그가 나를 누이신다. 양과 염소가 눕는 것은, 꼴을 뜯기 위하여 이동할 필요가 없는 상태, 즉 넉넉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여유로운 풍경입니다. 양떼가 우리로 돌아가 우리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여유로운 풍경입니다. 앞서 언급한 ‘푸른 초장’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봄철ㅇ나 마주하는 푸른 초장에 있다고 하여, 양떼가 그 들판에 눕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모습, 양뗴에 대한 목자의 태도가 담긴 표현이 푸른 풀밭에 누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지역에서 목자들의 들녘을 돌아다녀도 양떼가 여유롭게 들에 누워있는 풍경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푸른 초장에 눕게 한다’는 표현은 뒤에 이어지는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한다’는 것과 더불어 양떼가 누리는 최고의 환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자의 이끌을 드러내는 최고의 표현으로, 목자가 이런 최상의 조건(우리의 상상속의 푸른초장)으로 양떼를 이끄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여름철 내내 말라있던 마른 시내는 겨울을 맞이하면서 시내를 이루고 물이 흘러간다. 이곳도 쉴만한 물가이다.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어떤 ‘쉴만한 물가’가 떠오르는지요? 그런데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런 종류의 쉴말한 물가‘는 시인이 그린 그런 풀밭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속 광야, 다윗이 늘 마주하던 그 광야에는 물을 보기 힘든 환경입니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을 만나기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여름 건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사실 성경의 땅에서 우리가 개울이나 시냇물로 부르는 그것도 강으로 부릅니다. 성경의 강은,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 물의 수심이나 폭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의 수질도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비가 내려 형성된 웅덩이나 또랑, 마른 시내도 '쉴만한 물가'입니다. 양은 흐르는 물에서 물을 마시지를 못합니다. 잔잔한 물, 고여 있는 물에서야 편안하게 물을 마시곤 합니다. 양떼는, 물을 마시기 위하여 물가에 몰려들지도 않습니다. 몇 마리씩 교대 교대로 물을 마시곤 합니다. 어떤 질서가 양 무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목자가 일일이 명령하거나 통제하지 않아도, 차례차례 물을 마시는 양떼는 이상스럽게도 질서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쉴만한 물가는 그래서 다른 그림 언어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쉼터로 사용하는 맑은 시냇물가의 그늘 좋은 자리가 쉴만한 물가가 아닙니다. 잔잔한 물이 있는 곳 또는 고여 있는 물이 있는 곳, 그곳이 양무리에게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소는 양떼가 꼴을 뜯는 하루 일과 중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들을 가면서, 양떼가 꼴을 뜯고 있는 주변을 살펴봐도 어떤 형태의 개울이나 물웅덩이, 또랑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작은 물웅덩이 하나가 있어도, 아니면 목자가 챙겨둔 물가죽부대에서 양떼를 위해 부어주는 물통에 담긴 물조차도 쉴만한 물가가 됩니다. 

 

▲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어우러지는 겨울 우기가 끝나면서 이어지는 봄철의 들판은 전혀 새로운 시간이다.

 

다시 생각하기

 

푸른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환경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윗이 노래한 선한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그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는 객관적인 조건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목자와 양의 관계를 뜻합니다. 코로나19와 더불어 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요? 환경보다 관계? 오늘 우리에게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그곳에서 푸른초장을 누리고, 쉴만한 물가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이기를 소망합니다. 힘나는, 꿈이 솟는, 숨통 트이는 그런 시간의 연속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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