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문화로 성경 읽기(47) - 내가 전하는 복음은 살리는 능력인가? 아니면 독설인가?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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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3 [08:5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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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모형), 그 예루살렘에는 로마 원형경기장과 극장도 자리잡고 있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사마리아와 갈릴리, 흩어진 유대인 중) 가운데 (성서)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있던 이들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유대인의 가정교육이 철저해서 각 사람이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학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인 가운데 문자 해독이 가능했던 인구는 10 퍼센트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마을의 경우는 겨우 1, 2명이 히브리어를 읽을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 해독은 아주 능숙한 글쓰기와 읽기 수준이 아니라, 뜻은 몰라도 더듬더듬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것까지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두루마리에 적혀있는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나 서기관 등이 누리던 권세가 바로 글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발휘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간음 혐의로 이른 아침에 성전 마당에 끌려 나온 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 예루살렘 성전의 나팔부는 자리 표식으로, 성전 문을 열고 닫거나 기도 시간, 절기 등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볼었다.

 

성경 속으로

 

그 궁금함을 바탕으로 요한복음 8장을 다시 읽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현장은 성전 구역입니다. 여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이 장소는 여인의 뜰이거나 이방인 구역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여인은 남자들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본문에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정도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간음 상대인 남자는 누구였을까요? 남자는 왜 이 현장에 끌려오지 않은 것일까요? 게다가 이 여인은 어떻게 성전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끌려 나온 것일까요? 도대체 이 여인의 남자는 왜 이 여인을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미끼로 던져놓은 것일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내던져진 이 여인의 남자는 누구였던 것일까요? 혹시 이 여인의 그 남자도 이 무리 속에 함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악(인)은 꼼꼼하고 부지런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벌어진 그 시간은 '아침'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성전을 찾은 남자들은 왜 성전에 모여들었을까요? 유대인의 아침 기도(오전 9시)를 위해 성전을 찾은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침부터 심심하여 구경거리를 찾아서 성전에 모인 것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아침 기도에 나온 이들은 다수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종교성이 있는 이들이 아니었을까요? 이 여인을 성전으로 끌고 온 이들은 당시의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고라신 회당(기원후 4-6세기)에서 발견한 '모세의 자리', 유대인 회당에는 의자 형식의 '모세의 자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언제 이런 술수를 준비한 것일까요? 그들이 예수를 노리고 미끼로 던질 이 여인은 언제부터 노린 것일까요? 언제, 어디서 이 여인을 붙잡은 것일까요? 이들은 왜 이 아침 시간을 노린 것일까요? 예수가 그날 아침에 다시 성전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여인을 볼모로 삼고는 예수가 나타나기를 날마다 기다린 것이었을까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우연스럽게 이 여인을 붙잡은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여인의 존재는 익히 그들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볼모로 붙잡힌 이 여인은 그는 이미 돌에 맞아 죽은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던 여인의 절망을 떠올려봅니다. 그 아침에 성전으로 끌려오면서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여인에게 율법은 또 성전, 기도, 제사, 예배, 예배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요? 이미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수많은 죽음을 죽었습니다. 성전에 끌려 나와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성전을 찾은 이들의 거친 외침을 듣고 있던 순간에도 말입니다. 이 아침은, 여인의 회한과 공포, 절망감으로 뒤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율법 논쟁이 벌어집니다. 때아닌 공개재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을 예수를 죽이려는 이들의 그저 하나의 미끼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사람들이 묻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그 자리를 다 떠나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고대 히브리어?)은 누구를 위해 쓰신 것일까요? 여인을 미끼로 던진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성전을 찾은 이들이니, 히브리어 문자 해독자가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글을 모르는 이는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 예루살렘 북쪽 지역에서 발견한 납골함에 적혀 있는 고대 히브리어, '예호하난, 학콜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다시 생각하기

 

소란스러웠던 그 성전이 조용해졌습니다. 독설과 살기로 가득찼던 그 공간이 차분해졌습니다. 여인은 이 적막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었을까요? 두려움과 공포,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진 지금 무엇이 그 여인을 사로잡고 있었을까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 여인은 성전을 떠나 어디로 그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을까요? 그는 그곳을 떠나면서 무엇을 떠올리고,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돌아갈 곳은 있었을까요?

 

예배, 기도, 성전,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이에게 무엇일까요? 문득, 오늘 내가 읽는 성경, 내가 듣고 전하는 말씀과 설교, 다른 이에게 내가 말하고, 전해주는 그 성경은, 무엇일까 떠올립니다. 누구를 살리는 것에 주목하는지, 누구를 혐오하고 배제하고 죽이는 것에 더 쏠려 있는지? 우리의 전하는 복음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말로 들려지고 전해지고 있을까요?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누리고 나누는 일상을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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