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거리끼는 일, 스캔들
장덕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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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22 [01:3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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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영 수필가(미주장신 신대원, 에세이 에디터)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소문에 휩쓸린다든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낭패당하는 적이 있다. 웬만하면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지혜라는 걸 이제사 깨닫는다. 나이 60 바라보는 이때, 머리칼 희어지는 이때나 되어 삶에서 지혜로움이 뭔가를 알아차리니 100년 산들 하나님 뜻 하나를 알 턱이 없다. 도대체 나는 무얼 알고 사는지 스스로 묻고 싶다. 무엇을 먹기만 할 뿐,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아는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저 우주공간 클라우드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되어 클릭 한 번이면 무상으로 내려받을 은혜가 주어져도, 그저 발목 잡히는 인간의 일에만 몰두하는지라 매번 붙잡히고 '걸려 넘어져 거리끼는' 불편만 반복한다. 철저히 인간인 탓이다.

 

르네상스 초기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 <베누스와 마르스>가 있다. 그리스 신화 시절 잘나가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가 세상 헤게모니가 바뀌어 이탈리아에서 개명하여 재탄생한 게다. 그렇다고 '부활'까지는 아니다. 제우스 세 자식 곧 절름발이로 각종 도구를 만들어 내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쌈박질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는 정실 부인 헤라에게서, 마법의 허리띠를 차고 허구한 날  사랑만 해대는 아프로디테는 디오네에게서 난 자식이니 배다른 남매간에 벌어진 낯뜨거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의 어쩌구저쩌구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 비너스의 탄생 )

 

제우스는 유독 못생기고 다리 저는 헤파이스토스에 마음이 가는지 아리따운 딸 아프로디테를 그와 짝지어주나 사랑의 여신은 남편 헤파이스토스를 놔두고 잘생긴 전쟁의 신 아레스와 불륜을 저지른다. 여신의 유혹 앞에 서면 신과 인간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꼬리가 늘어지면 밟히기 마련. 헤파이스토스는 두 불륜 커플을 일타에 잡아내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제작, 침대에 설치한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두 신은 열렬히 사랑을 나누다 벌거벗은 몸으로 그물에 갇혀 침대 위에 매달리고 현장을 덮친 남편은 신들에게 아내의 부정을 발설한다(1).  여기 사용한 그물이 헬라어로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이다. 거꾸로 매달아 올리는 올무, 올가미, 덫, 함정, 유혹을 말하며 그 동사 ‘덫으로 잡다, (추문에) 걸리다, 걸려 넘어지다’가 되고 이 말을 다시 옮겨 ‘거리끼다 (걸려서 방해가 되다)’가 나온다. 유대인들이나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주 쓰는 그 말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께서 비로소 죽음을 털어놓자 선임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막8:32) 섞인 속내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일을 제쳐놓고 사람의 일만 머릿속에 담고 있다며 예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탄이란 험한 말을 던진다. 연이어 세 장을 (막8,9,10장) 할애, 예수님의 수난 예고 기록 곧 한결같이 모욕과 고통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노상에서 토론한 게 뭐냐 묻자,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지에 대한 토론이었다는 한심무모한 대답을 전한다. 이런 제자들로 적잖이 실망, (이미 알고 계셨을 테나) 그들을 뒤로한 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생각해 본다. 

 

스토리는 절정으로 치닫는데 정작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늘 '거리끼듯 σκάνδαλον' 깨닫지 못한다. 배반한다. 고발한다. 모른다 부정하며 모두 도망친다. 예수께서 홀로 골고다를 오른다. 장차 다가올 십자가 고난의 현장을 함께하며 지켜줘야 할 열두 제자는 하나도 없다. 우리 인간들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대로다.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는 어떤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죄다 잡아 게임에 던져넣거나 말뚝에 묶어 화형시키던 그때, 나는 어디 있었는가. 일말의 양심이 있어 아리마데 사람을 찾아가 장례 때나 같이 가자 했을 테다. 하나님께서 심어준 심성은 어디 가고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속됨만 드러내 진실로 부끄럽다. 제자도네 사역이네 하는 말은 애당초 내게 어울리지 않을 성싶다. 내 삶에 주어질 만한 사역이란 게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저 성경 몇 구절 읽고 느낌이나 써올리는, 얄팍한 수작으로는 참된 말씀과 몸된 교회에 수치만 더할 뿐이다. 

 

나는 매번 무엇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가. 나를 거리끼게 함은 무엇인가. 놓인 방해물이 없음에도 나는 늘 걸려 넘어지는 일상을 반복한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탓인가. 기도가 충만하지 못한 일인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막9:29) 아무래도 개선 방안이 나오지 않을 듯하다.

 

(1) 이 사건 이후도 흥미롭다. 아프로디테는 처녀 샘이 있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 → 아프로디테 신전 ) 사과와 보상을 받아주겠다는 포세이돈의 중재로 아레스는 그물에서 풀려 자기 신전이 있는 트라키아로 간다는 후기가 있다. 그러고도 텍스트 메시지를 통해 계속 밀애를 즐기며 자식들을 낳는다. 사랑의 신과 전쟁의 신은 오늘까지도 사랑과 전쟁이라는 큰 이슈를 낳고 있다. 그 자식들이 쌍둥이 아들 포보스와 데이모스, 딸 하르모니아 (Harmonia조화)이다. 사랑과 전쟁 사이에서 공포와 조화라는 부조화를 읽는다. 아버지 마르스의 전쟁터에 늘 함께하는 두 아들을 기억하여, 미 천문학자 Asaph Hall이 화성의 (Mars) 두 위성 이름을 Phobos와 Deimos로 명명한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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