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불안한 유리그릇 같은 평화
<내 기도를 바꾼 기도>를 읽고
배안호 선교사(파라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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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20 [07:33]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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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안호 선교사(파라과이)

모든 신자는 평생 기도학교의 학생이다.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귀가 따갑도록 배우고 또한 가르친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학점의 평점은 낙제점에 가깝다.

 

<내 기도를 바꾼 기도>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설교자로 널리 알려진 이동원 목사가 ‘내 기도의 목록을 바꾸었다’고 진솔하게 실토하는 그의 ‘기도고백서’ 이다.

 

이 책은 지난해 안식년 중에 규장문화사의 여운학 장로님이 건네주신 선물이다. 그간 책꽂이에서 잠자던 이 책을 새해에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영원한 멘토, 선배 선교사인 바울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 책은 서문의 첫 문단에서부터 나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이동원 목사는 “바울의 기도를 연구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 기도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나와 내 가족의 건강, 내 삶의 번영을 위한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그가 중시했던 성경적 기치들이 시종일관 담겨 있었습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13개의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14개 기도에 각각 기도꼭지을 붙였다. ‘참된 앎을 위한 기도’, ‘삶의 균형을 위한 기도’, ‘속사람의 강건을 위한 기도’, ‘육체의 가시를 위한 기도’…’인생 결산을 위한 기도’ 등등이다. 이를 주제에 따라서 4부로 나누었다. 제1부는 ‘자신의 영적 강건을 위해 기도하라’. 제2부, ‘기도의 지평을 넓히라’. 제3부 ‘자신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마지막은’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붙들라’. 필자에게는 3부가 가장 큰 감동이었다.

 

필자의 가장 오랜 고민은 나 자신의 초라한 영성이다. 20세에 거듭난 이후 지난 48년여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끊임없이 더 풍성한 은혜, 더 친밀한 주님과의 교제를 사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나의 영성에 늘 불만족이었다. 변하지 않는 평화와 행복을 일상의 삶에서 기대하며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며 평화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특히 3년 전부터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입만 열면 평화, 평화통일, 남북평화, 평화경제 등을 자주 언급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통령의 말만의 평화, 기만과 허구의 평화 쇼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정치적, 군사적 평화는 얼마나 불안한 유리그릇 평화 인가? 

 

바울이 살던 1세기의 특징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였다. B.C 27 – A. D 180년까지의 로마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지된 평화의 시기! 화려한 외적인 평화는 있었지만 내적으로 참으로 불안한 가짜평화 시대였다.

 

이런 정치적 외교적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 확실한 행복을 기원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한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을 두고 John Stott는 ‘모든 때, 모든 곳에서의 평화’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본문에서 이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인간관계의 갈등’이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 당시의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생활을 둘러싸고 불편한 갈등들이 존재하였다.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15절은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로 형제같이 권면하라”이다.

 

실로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인간관계를 평화로 지킬 수 있는 비밀이 있을까?

 

그 비밀은 평강의 주님께 ‘모든 때, 모든 곳에서 평강을 주시게 기도하는 것’ 사막의 교부들은 숨 쉬는 순간마다 ‘숨기도(Breath Prayer)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기도의 사람, 바울도 이것을 알고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가르친 것이다. 

 

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거룩의 주제를 말하면서, 거룩의 하나님이 아닌, 평강의 하나님을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평강, 즉 샬롬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거기에서 거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시 성경말씀에 정답이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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