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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쿠바를 다녀와서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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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10 [01:27]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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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봉 원로목사(동대전성결교회)

LA의 교회에서 첫 번째 집회를 마친 후, 두 번째 교회에서 주일설교와 자기계발 세미나를 하기까지, 한 주간의 여유가 있어 미지의 선교지 쿠바로 시간속의 여행을 다녀왔다. 한 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혁명가 호세 마르티, 카스트로, 체 게바라가 주도한 민족, 민중혁명의 현존에 대한 실상과 사회주의 체재 아래에서의 종교의 역할과 사회적 기능, 개신교의 복음 전파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싶었다.

 

LA에서 마이애미까지 비행기로 5시간, 마이애미에서 쿠바 아바나 공항까지 1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아바나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의 첫인상은 국제공항이라 하지만 국내의 지방공항 보다 약간 큰 규모이었다. 관광객들에게는 까다로운 수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동안 닫혀져있던 국가이기에 긴장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공항에는 사전에 연락을 하여둔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쿠바 현지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선 환전을 하여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환전소로 향했다. 달러를 현지화폐로 바꾸는데 왠지 셈법이 달랐다. 이유는 달러는 일단 환전수수료로 세금을 공제하고, 남은 돈으로 바꾸어 주지만 환율이 쿠바 화폐가 더 높기 때문이었다.

 

1대 0.86(?) 쿠바정부는 ‘현지인들에게는 돈을 적게 받고, 외국인들에겐 많이 받겠다’는 취지로 C.U.C 라는 관광객용 화폐를 만들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화폐이다. 실제 생활의 가치는 그렇지 않은데...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쿠바 공무원이나 일반인들의 월 급여는 20불에서 30불 수준이다. 운전기사는 16불 수준이다. 그런데 1대1일 보다 높은 화폐가치로 환전을 하여준다. 1차 멘붕(?)이었다.

      

환전 후, 주차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을 보았다. 호객행위는 거의 없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정복경찰과 사복경찰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는 1960년대의 올드 택시와 노란 신형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신형택시는 쿠바정부가 운영하는 회사의 소유이다. 택시를 보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속의 여행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 허상봉 목사

 

첫째 날 저녁 올드타운 까사(전통 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택시 기사가 숙소로 안내하는 동안 수도 아바나 올드타운 골목길을 관찰하며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된 후 50여년이 지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심지 주택의 폐허와 슬럼화를 보며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 놓은 실상을 보았다.

 

쿠바는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美西戰爭)은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에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쿠바의 독립운동이 스페인에 의해서 거부되자 이를 해결할 것을 미국이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국 내의 강력한 확장주의적 정서가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괌을 포함한 스페인의 잔존 해외 영토를 병합하도록 부추겼다. 아바나에서 일어난 혁명은 미국이 전함 메인 호를 보내 그들의 높은 국가적 관심을 보이도록 자극하였다. 메인 호의 폭발로 미국인들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스페인이 자신의 식민지를 억압하고 있다는 황색 언론은 미국의 여론을 움직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노예 문제로 촉발된 내분으로 남북전쟁을 겪은 후 내부 정비와 북미 대륙 개척에 몰두하던 미국이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 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공산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 허상봉 목사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61년에는 그 혁명이 사회주의적임을 천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혁명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독재자들을 지원하였다.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 경제에서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일관하였다. 쿠바에는 양심수가 500명에 이르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2008년, 병이 중해진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한다(출처 : 위키백과).

 

관광객을 위한 민박시설 까사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물을 보존하며 외양은 오래되어 낡았지만, 정부가 국민에게 주택을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어 준 곳이다. 허름한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 슬럼가를 들어가는 것 같은 환경에 불안한 마음이 살짝 앞섰다. 그러나 굳게 잠겨있는 세 개의 문을 지나 3층 실내로 들어갔을 때 거실 겸 로비, 식당으로 사용하는 곳의 분위기는 1960년대 한국 가정의 실내 같았다. 비교적 방안과 침구가 깨끗하였지만 부대시설은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작은 아날로그 TV(LED TV를 설치한 까사도 있다), 진공관 라디오, 오래된 구형 전화기... 시간속의 여행임을 실감하게 한다.

 

 © 허상봉 목사

 

집 주인은 정부로 부터 까사의 운영 허가를 받기 위하여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 기본시설을 갖추고, 교육을 받아 관광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하려했으나 생필품의 부족으로 마음뿐인 것 같았다. 실제로 모 TV에서 방영되는 쿠바 여행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출연진들이 아침 식사를 할 때 받은 음식이 내가 까사에서 아침마다 받은 메뉴와 똑같았다.

 

오래된 낡은 침대, 옆방의 소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시스템, 쿠바는 시설이 설비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국가에서 통신을 통제하며 검열하기 때문에 인터넷 카드를 구입한 후 특정지역에서만 사용하여야 한다. 일부 광장이나 관공서 주변에서만 미리 구입한 인터넷 카드를 사용하여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다.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쿠바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는 국가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체재에 대한 불만이 허용되지 않는 국가이다. 어쩌면 북한과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순응적 선호’라는 단어가 생각나면서, 일전에 탈북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서울 한 복판에서 저렇게 반정부 시위를 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증거이다.” 
 

과거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독립 후 자유경제체재와 자본주의를 수용하였으나 미국 기업의 독점, 미국 정부의 정치적 압제를 받으며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러시아의 지원으로 혁명을 일으키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 국유화, 공유화하여 잘사는 사회주의 국가로 존립하려 하였으나,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제재 및 압박으로 50년간 고립된 국가가 되었다.

 

쿠바는 이에 미국에 대항하여 미국식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미국계 다국적 기업을 철수시키고, 자본을 몰수하였다. 특히, 세계 공용화폐로 통용되는 달러에 대하여 10% 이상 높은 비율의 환전수수료를 공제한 후 거의 1대0.86의 통화가치로 환전을 하여준다. 현지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고율의 환율 수수료와 유통화폐의 1대0.86의 교환은 공식적으로 미국을 거부하는 정치적 표시라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오는 관광객은 비자비가 면제이며, 멕시코 경유 관광객의 비자비는 40불이다. 미국에서 입국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비자비 100불을 내야한다. 이는 미국에 대한 보복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허상봉 목사

 
쿠바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경제적 번영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부도 및 파산의 상황을 맞이하여 다국적 기업이 철수하였고, 한국의 모기업도 200억불의 사업비를 쿠바로부터 받지 못하여 철수하였다고 한다. 쿠바정부로부터 사업비를 받지 못하여 국제보험회사로부터 200억불을 보상받았으나, 국제보험회사는 이후 한국기업의 쿠바 진출 시 보험가입을 거절하고 있다고 현지인이 전했다.

 

쿠바는 아직도 1960년대 한국의 사회와 경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과 달리 쿠바는 현재로서는 경제적 발전의 가능성을 보기 어려웠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제재가 풀린다면 혹시... 그래서 쿠바시민들은 미국을 국제깡패(?)로 생각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북한을 떠올려본다.

 

국부로 존경받는 호세마르티, 정치적, 사회적 영웅 카스트로, 혁명가 체 게바라가 주도한 공산주의 혁명은 쿠바 국민에게 혁명으로 세운 자주 독립국의 자긍심을 심어준 것이며, 그들은 국민들에게 사상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품었던 사상과 이념과 혁명운동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쿠바국민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참고로,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나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외에는 취업 할 곳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정오에 거리를 보니 학생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오전수업을 마친 줄 알았더니,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질이 낮은 무료급식 때문에 대다수 학생들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귀가 후, 집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서 오후 수업에 참석한다고 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떠나 남쪽과 북쪽을 여행하면서 이미 문이 닫힌 지 오래되어 폐허가 된 공장들을 보았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벌판의 사탕수수 밭을 바라보며 애니깽의 역사가 떠올랐다. 애니깽은 100여 년 전 한반도를 떠나 지구 반대편 낯설고 물 설은 험지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이다.

 

쿠바는 1905년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멕시코 이민 1세, 애니깽들이 남미에서 노동계약 기간이 끝난 후 새로 선택한 땅이다. 애니깽이라는 말은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데 쓰인 선인장 ‘에네켄’에서 유래된 말로 한인 1세들의 별칭이다. 애니깽의 후손은 오늘도 쿠바에 살고 있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빈부의 차이가 크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이주하여 살았던 스페인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는 일부 사유재산이 인정되어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 그리고 공무원 가운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잘 산다. 그렇지만 국민 대다수는 빈곤한 상태로 살고 있다. 특히, 흑인 노예로 팔려왔던 이들의 후손은 지금도 가난과 빈곤에 허덕이면서 생필품의 절대부족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은 선조들이 노예시절에 겪었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아프리카 고향을 생각하며 고된 노동과 힘든 삶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마음을 달래며 지내왔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춤과 노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서 주변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등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지닌 천성적인 성향의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발랄한 자유분방함이 나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미국인으로 종군기자이며 작가였던 헤밍웨이는 쿠바 아바나 외곽에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대다수 쿠바 사람들이 살았던 빈한한 생활과는 달리 넓은 저택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던 곳을 보았다. 그는 고급스러운(?) 취미생활과 3번의 결혼생활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또한 애견을 사랑하여 정원에 3마리의 무덤을 만들었으나 사냥하여 잡은 동물의 머리를 박제하여 거실과 서재의 벽에 걸어 놓은 것을 보며 인간이성의 이중성을 볼 수도 있었다.

 

헤밍웨이는 우울증으로 인한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가 자살한 불행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허무한 것임을 표현한 것 같다. 쿠바 시민들의 절대다수가 생필품이 핍절한 가운데 헤밍웨이는 부유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보여준 것은 허무한 인생이었다. 전도서 말씀이 생각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헤밍웨이는 소유한 것은 많았지만, 거의 대부분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빈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작은 어촌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던 것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어촌의 사람들은 그때를 회상하며 바닷가에 흉상을 세워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다.

 

 © 허상봉 목사


쿠바는 지금도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미국의 제재 하에 국제상거래를 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국가재정의 고갈로 기간산업에 투자를 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자본의 부재는 빈곤의 악순환을 보이며, 국제적인 제재로 외국기업이 들어오지 않으면 고용의 기회가 없다.

 

나를 안내한 현지인은 쿠바에서 7년 동안 소고기를 구매할 수 없어 먹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국가에서 우유 공급을 위해 소를 키우지만, 도살 후 고급식당에서 전량 구매하거나, 고위층에 유통하고 때문이며, 국민들은 적은 봉급으로 사먹을 수가 없는 형편이란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생활용품과 의약품 절대부족하다고 한다. 입던 옷을 보내주면 매우 유용하게 나누어 줄 수 있겠다고 한다.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쿠바 전국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관광지로 개발된 곳과 도시에는 윤택한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 큰 집에 현대식 전자제품을 들여놓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관광지역을 탐방하며 비교하면 생활의 수준차이를 알 수 있다. 쿠바정부는 관광수입을 위하여 관광지를 정책적으로 개발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본이 없기 때문에 시설확장이나 보수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국민 대다수는 어렵게 산다.   

 

쿠바정부는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게 위한 방법의 하나로 매년 많은 비용을 들여 혁명의 불꽃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는 이미 순응적 선호가 된 국민들의 마음에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 같다. ‘순응적 선호’란 사회과학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체재 아래서와 같이 억압당하는 사람들, 또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현상이다. 축제의 기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보면 허전함으로 지내면서 또 1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역사의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의 의미를 자신들의 체재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정권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혁명가에서 통치자가 된 카스트로는 군복이나 트레이닝복을 착용하고 국민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이는 혁명가의 모습과 일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트레이닝복도 모 회사의 제품만 선호하였다고 한다. 쿠바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국가이며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이다. 인터넷을 통제하므로 이메일이나 카카오톡을 검열하고, 집단시위를 불허하며 사전에 통제하는 수단이 잘 되어 있어 정부에 대한 불만은 엄벌에 처하는 국가이다.

 

쿠바는 젊은이들에게 꿈, 비전이라는 단어와 말도 줄 수 없는 곳이다. 소수의 기업이 있지만 국영이며, 자영업은 재원이 없어 시작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포르투갈에서 온 여행자는 “쿠바여행은 충격이었다고 하며 북한과 같다. 사회주의 국가의 현존하는 실상”이라고 하였다. 독일에서 온 여행자도 만났고, 싱가포르에서 온 젊은 중국인 여행자도 만났다. 중국인 젊은 여행자에게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자연의 아름다움은 뛰어난 곳이라고 하면서 정치와 사회체재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하였다. 다만, 충격이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쿠바는 선교를 하여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선교를 할 수 없는 체재를 가진 국가이다. 아마 북한도 그러하리라 본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는 국가이다. 특히, 외국인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에 즉시 추방당할 수 있는 곳이다. 목사, 선교사라는 신분은 경계의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쿠바는 북한과 수교를 맺은 국가이다. 아직 대한민국과 수교는 없지만 경제활동을 위하여 아바나에 무역관이 있어 한국인이 상주하고 있으며, 비상시에는 멕시코 대사관의 도움을 청하여야 한다. 소수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이 쿠바에 거주하게 된 배경은 다양하며 정치적으로 예민하다. 수도 아바나 시에는 한국인보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더 많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어릴 때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으며 영세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쿠바 선교지 여행에서 얻은 소득 가운데 하나는 <FIDEL & RELIGION> 책을 구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카스트로가 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는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또 한권은 <REMEMBERING CHE> 이다. 이 책은 체 게바라의 아내가 저술한 것으로,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 살아온 족적을 살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두 권의 책에서 종교의 순기능이 얼마나 중요한가와 역기능의 피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혁명의 절대가치와 이념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이념과 가치가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 시기에 누구를 만나며, 어떠한 책을 읽으며, 어떠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가에 따라 자신의 미래는 물론, 공동체의 미래와 국가의 미래,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닫혀 진 국가, 쿠바는 선교의 관심에서 나의 호기심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철저하게 통제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과 가치로 무장된 국가인 쿠바는 북한과 함께 지구상에 있는 곳이며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번영과 발전이 지상의 궁극적 목표는 아닐지라도 국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경제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며, 함께 편리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일을 발전시켜 나가며 국민을 위하여 제공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이념적으로 대치하며 고립된 국가로 현존하는 쿠바를 보면서 개방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북한은 가보지 않았지만, 매스컴을 통하여 보고 들은 정보와 자료, 북한 인접국에서 관찰하거나 탈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면, 북한은 쿠바와 유사한 점이 너무 많기에 북한 주민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다. 쿠바나 북한이나 누구를 위한 정권이며,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다시 생각한다. 로마제국 하에서의 기독교를 생각한다. 

쿠바를 식민지화 하였던 스페인과 그 당시의 가톨릭 그리고 쿠바가 독립하는데 일조하였던 미국과 미국의 가톨릭은 정치와 종교의 역기능으로 쿠바 국민의 국민적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도 이러한 면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경계하고, 자존주의 국가의 종교에 거부감과 저항감을 갖고 있다.

 

짧은 일정에 쿠바에 대한 전부를 파악하고, 다 알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나는 사회주의 체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고, 국가의 경제적 수준을 보았다. 그리고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거룩’은 성경적 구호가 아니라, 어느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사랑과 섬김으로 표현되는 삶의 신실함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종교는 제도 위에 군림하여 영역을 넓히는 집단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역할을 위하여 사람의 심성과 이성에 선함의 순기능을 사명으로 이행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생각해 본다. 더 나아가 개신교, 교회는 우리 사회에 무엇을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여야 하는 가를 되짚어 본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ON THE BASIS OF SEX> 라는 영화에서 미국 대법원에 쓰여 진 글을 보았다. ‘이성은 모든 법의 정신이다’ 영화에서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의 프로인드 교수는 판결의 일관성에 대한 강의에서 “판사들은 선례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적 변화 역시 무시를 못한다. 그날의 날씨는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없지만 시대의 기후는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시대의 기후는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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